2005.10 |
우리들의 화초장
관리자(2005-10-13 15:33:51)
우리들의 화초장
수제화는 이미 종언을 고했습니다.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구두 가게가 아직도 남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가게들이 습관처럼 문을 열어두고 옛정에 기대어 손님을 기다릴 뿐입니다. 수제화의 따뜻함을 간직한 구두 가게가 몇 개는 살아남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어느 도시에 구두 가게가 대여섯 군데 있었습니다. 어느 해 한 사내가 이사를 왔습니다. 기워 신은 구두가 입을 크게 벌리자 그는 새 구두를 맞추기로 하였습니다. 어디가 좋을까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이 집이 좋다 저 집이 좋다 취향이 각각이라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가볍고 발이 편한 구두, 품질에 비해 가격이 적당한 구두, 견고하여 오래 신을 수 있는 구두 등등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그의 마음에 모락모락 궁금증이 피어 올랐습니다. 여하간, 반달 좌우간에, 총점을 매긴다면 뉘 솜씨가 제일일까?
다음날 그는 가까운 구두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구두장이는 나무로 만든 발틀에 가죽을 입히고 있었습니다. 진열해 놓은 구두를 둘러보다가 그는 손님용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이런저런 말로 한참 뜸을 들인 뒤에, 구두장이가 걸친 가죽치마를 바라보면서,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습니다. “이 근동에서 누가 구두를 제일 잘 만드는 것 같소?” 구두장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송곳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대답합니다. “나보다 잘하는 놈 없을 것이여.” “아, 그려. 역시 당신이 최고구먼. 허면, 당신 빼고 누가 질이요?” 구두장이가 잠시 손길을 멈추고 흘깃 쳐다보더니 마지못해 입을 엽니다. “다리 건너 장 씨가 안창 대는 솜씨는 좋지.”
그는 이렇게 나머지 구두 가게를 순방했습니다. 사실은 세 번째 집에서 도시 제일의 구두 명장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살만한 곳에 이사를 왔다고 내심 흐뭇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 자존심이 좀 세기는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디선가 남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처음 들으셨나요? 자, 이번에는 아시는 이야기를 틀어보겠습니다. 판소리 <흥보가>입니다. 놀부가 흥부 잘 살게 되었단 말을 듣고 찾아가 온갖 행패를 부린 후에 들고 나온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화초장이었지요. 강도근 명창의 <흥보가>에서 중중머리 화초장 타령을 들어보십시오.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얻었네, 얻었어. 화초장 한 벌을 얻었다.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한 벌을 얻었다. 얻었네, 얻었어. 화초장 한 벌을 얻었다. 또랑 하나를 건네뛴다. 아차, 잊었다! 아이고, 이것이 무엇이냐? 아이고, 이것이 무엇이냐? 갑갑허여서 내가 못 살겄네. 아이고, 이것이 무엇이요? 거꾸로 뒤붙임선 모르겄구나. 초장화, 아니다! 장화초, 아니다! 아이고, 이것이 무엇이냐? 방장, 천장, 구들장, 아니다. 아이고, 이것이 무엇이여? 매운장, 된장, 송장, 아니다. 아이고, 이것이 무엇이여? 갑갑하여서 내가 못 살겄네. 아이고, 이것이 무엇이여?”
놀부가 그날 화초장을 짊어지고 간 까닭은 화초장 안에 금은보화 두 궤짝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흥부가 사람을 시켜 다음날 갖다 주겠다고 하자 놀부는 내용물을 빼돌리고 껍데기만 갖다 줄 깜냥이냐고 의심을 합니다. 다른 사람도 다 저와 같은 줄만 아는 놀부의 심보로 보면 응당 그래야지요. 그래서 그 무거운 화초장에 멜빵을 걸어 등에 지고 낑낑대며 돌아갑니다. 개울을 건너뛰다가, 아차, 그만 건망증이 도지고 말았습니다. 화, 초, 장, 세 글자로 만들 수 있는 단어는 모두 여섯 개인데, 그 안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욕심이 앞을 가리니 혀끝에 두고도 못 찾은 것입니다.
한 줄도 길다는 하이쿠를 읽다가 기가쿠를 만났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산위의 눈도 가볍게 느껴지네.” 어떻습니까? 인간성에 대한 통찰이 절묘하지 않습니까? 놀부의 마음이나 구두장이의 마음이나 욕심은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동네 구두장이는 제 손끝의 구두만 구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드는 사람이나 신고 사는 사람이나 모두 다 구두의 임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화초장이 무엇인지 혼자서 물어보는데, 입안에서 뱅뱅 돌기만 하고 밖으로 나오질 않습니다. 저도 놀부처럼 욕심에 눈이 멀었나 봅니다.
| 정철성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