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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9 |
오랑캐는 없었다
관리자(2005-09-08 17:24:07)
오랑캐는 없었다 『오랑캐의 탄생 - 중국이 만들어 낸 변방의 역사』 (니콜라 디코스모 지음,  이재정 역, 황금가지 펴냄) 글 | 김병남 팬아시아종이박물관 학예연구사 이 책을 말하기 전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너무나도 뻔하지만, 출판사의 기획력에 한동안 당혹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원 제목은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The Rise of Nomadic Power in East Asian History로 굳이 직역하자면 『고대 중국과 그 적들―동아시아의 유목 국가 성장사』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랑캐의 탄생』이란 감각적인 제목 덕분에 일반 독자들이 책의 구매와는 별개로 일단 이 책을 집어들만큼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실제 서평을 써야하는 필자 또한 그 제목만을 듣고 선뜻 수락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받고 책장을 넘기는 그 순간 아차하는 후회의 탄식부터 나왔다. 이 책 말미에 쓴 ‘옮긴이의 말’에는 “비록 전공자가 아니어서 세부적인 것을 다소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흥미롭고, 또는 진지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아마도 ‘중국고대사’를 전공하지 않으면 역사전공자라도 ‘다소 이해가 어렵게’ 느껴지는 전문 학술서적이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에게도 쉽게 추천하는 것이 주저된다. 그럼에도 제목 때문에 책을 손에 잡은 평범한 독자들을 위해 우선 충고한다면, 시간이 걸리고 인내심이 조금 필요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선 독자들은 ‘제1부 고고학을 통해 얻은 성과들(27~125쪽)’의 무미건조(dry)한 유물·유적의 나열 속을 헤쳐 나가야 한다. 여기에서 저자(著者)는 유라시아 초원 지대에 목축이 확장되는 과정, 청동 야금술, 수공업 기술을 발전시킨 문화의 등장과 북중국의 유적들 사이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려 하였다. 따라서 러시아와 중국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의미들을 차분히 살펴볼 필요성은 있다. 하지만 이를 자세히 음미하기 위해서는 또한 수없이 등장하는 유적 지명들을 읽으며 아시아 지도를 옆에 두고 찾아보는 정성이 뒤따라야만 독자들이 이해하기가 좀 더 용이할 것이다. 이게 힘들면 차라리 건너뛰어 ‘제2부 문헌에 기록된 변경과 오랑캐(129~218쪽)’와 ‘제3부 변경의 정치학(221~329쪽)’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저자는 중국과 북방의 대립·변천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 몇 시기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진행된 중국 세력의 북방 정벌 과정이었다. 저자는 중국이 ‘동주(東周)라는 정치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독립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135쪽)’의 제후국 체제인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자신들의 주변에 공존하던 이방인(異邦人)인 융(戎)·적(狄)을 정복하였는데, 이처럼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미치는 범위 바깥에 위치하여 주나라 연합체의 구성원에 속하지 않았던 주민들이 주나라 제후국들과 충돌한 것을 『춘추』등의 기록에서는 “문명(=중국)과 야만(=융·적) 사이에 벌어진 거대한 단절(148쪽)”처럼 표현하였지만 이는 사실을 예외 없이 단순화시키고 모호하게 만드는 수사적 겉치레라 보았다. 오히려 중국의 필요에 따라 동맹을 형성하여 이용하거나 아니면 팽창을 원할 경우 군사주의 정책을 추구하면서 서기전 5세기 끝 무렵에 독립적 정치 단위로서 적(狄)과 융(戎)을 소멸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정치적 태도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도 마찬가지이다. 진(秦), 연(燕), 조(趙) 등 여러 국가들은 국력을 성장·팽창시키는 과정에서 다시 좀 더 낯설고 더욱 어려운 북방 민족 호(胡)와 마주치게 되지만, 이때에도 중국은 북방과 끊임없는 교류·충돌의 와중에서도 군사적·문화적 흡수를 통해 압박하는 기민한 모습을 보였다. 저자는 서기전 307년에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유명한 기병 부대를 창설하거나 각국이 경쟁적으로 행한 장성(長城)의 건설 등은 북중국 국가들의 전체적인 ‘팽창주의 전략의 일부(214쪽)’라고 보았다. 이는 매우 타당한 견해로 생각되는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장성이 호전적인 유목민들의 급습에 대비하여 중국 농부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인 조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장성이 시종일관 각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전략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건설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장성이 유목민과 농경민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라기보다는 유목민들이 목축 생산에 이용하는 넓은 초원 지역 한가운데 세워지는 등 이방인=유목민들의 영토로 확장해 들어가면서 군사적 통제 수단으로, 또 이들 지역의 식민화를 촉진할 수단으로 건설하였고, 이런 형태를 계승한 진나라가 중원을 재통일하면서 연결 완성하였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북방 확장은 결국 북방 민족에게 위기 위식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대응하여 흉노(匈奴) 사회의 군사화, 중앙집권화의 과정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정치 구조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서기전 198년에 흉노왕 묵특은 한고조 유방의 친정군을 평성(平城)에서 포위하여 궤멸적인 패배를 안겼다. 그 결과 중원과 북방의 두 세력은 처음으로 중국이 북방 이웃에 비해 열등한 지위에 있음을 인정하는 조약 즉 ‘화친(和親)’을 맺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세계 질서(260쪽)’는 전한 무제(武帝, 서기전 140~80) 시기의 성공적인 군사·정치적 원정(遠征)으로 인해 역전되고 만다. 이에 따라 흉노는 북방의 초원과 삼림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황하 이남 지역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고비 사막 남쪽도 포기해야 했다. 마침내 흉노-한 양극 체제에 기초한 외교 관계는 흉노왕 호한야(呼韓邪)가 전한 선제(宣帝)에게 열등한 지위를 인정한 서기전 51년에 끝나고 말았다. 따라서 150여년 가까이 지속된 북방(흉노) 우위의 세계 질서는 결국 중국 주도의 세계 질서로 전환하고 만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저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분석한 ‘제4부 오랑캐의 탄생(333~404쪽)’에서 종래 『산해경』등 초기 문헌 자료들이 북방 민족에 대한 초현실적·신화적인 서술에 치우친 것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검증과 조사에 기초한 합리적인 서술이 중국 사회에 가져다준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려 하였다. 저자는 사마천이 ‘제국’의 규모를 이룰 만큼 위협적인 면적을 확보하며 중국의 맞수로 성장한 북방 유목민들을 철저히 조사함으로써, 이들 이방인의 위협이 매우 심각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사마천은 내륙아시아에 일종의 역사적·우주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이 지역을 넓은 이성적 시야 속에 끌어들여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이념적 조작(384쪽)’을 통해 북방 유목민을 중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 통합하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새롭고도 현재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중국과 북방 민족의 투쟁은 흉노 이후에도 계속 나타나는 것이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이 투쟁은 한 때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중국 민족에게는 언제나 승리로 이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적떼 같이 무리를 지어 노략질을 일삼는다고 알려진 오랑캐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명백하게 오랑캐는 여전히 ‘존재’하는 셈이 된다. 이것은 일견 모순처럼 보이나 원리는 간단하다. 중국에 대적하는 한 주변 민족이나 국가는 여전히 오랑캐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중국에 의해서 중국을 공격하고 위협했던 세력, 나아가 중국의 이해와 충돌하는 세력은 언제나 잔인하고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오랑캐로 만들어지며, 사마천이 이방 영역으로 진군해 들어가는 것을 중국의 ‘명백한 숙명(387쪽)’으로 표현한 것처럼 결국에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안에 용해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중화제국(中華帝國)의 날카로운 칼끝이 정치적?군사적·역사적·문화적으로 이제 하나 남은 ‘오랑캐인 우리(東夷)’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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