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9 |
<제101회 백제기행>중국기행 _ 공자, 그리고 인(仁)을 찾아서
관리자(2005-09-08 17:22:46)
백한 번째 백제기행, 나에게는 첫 번째 백제기행
지난 8월 3일 오후 2시, 버스는 정확히 우리의 집결장소를 벗어나고 있었다. 전날부터 꽤 많은 비가 내려 노심초사하던
우리들에게 ‘걱정 말고 오세요 태풍이 아니라 그냥 비랍니다’ 라고 문자 메시지가 두 번이나 날아오지 않았던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씻어내고자 가족소개가 이어졌다. 어른 23명, 어린이 13명, 총 36명으로 8세에서 70대까지
큰 대가족을 이루어 ‘공자 그리고 인(仁)을 찾아서’ 떠나가고 있었다.
글│ 김병성 광주지방국세청 법무담당
우리의 삶에 있어 ‘선택’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으랴!
전주 아니 전라도의 문화를 두 어깨에 짊어지고 힘겹게 이끌어 가고 있는 사단법인 마당을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문화기행의 대명사 백제기행을 덩달아 알았고 백한 번째 5박6일의 중국 역사기행을 알았으니 우리 가족의 첫 백제기행은 올 여름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제 일 주일이 지나 중국요리의 기름기는 배 멀미 기운과 함께 사라지고 있지만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추억은 남았다.
가자! 중국으로
지난 8월 3일 오후 2시, 버스는 정확히 우리의 집결장소를 벗어나고 있었다. 전날부터 꽤 많은 비가 내려 노심초사하던 우리들에게 ‘걱정 말고 오세요 태풍이 아니라 그냥 비랍니다’ 라고 문자 메시지가 두 번이나 날아오지 않았던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씻어내고자 가족소개가 이어졌다. 어른 23명, 어린이 13명, 총 36명으로 8세에서 70대까지 큰 대가족을 이루어 ‘공자 그리고 인(仁)을 찾아서’ 떠나가고 있었다.
군산에서 청도까지 배로 5시간?
세원1호, 군산과 청도를 오가는 훼리의 이름이다. 우리를 데려가고 데려오는 놈이었다. 참 묵직하고 든든한 놈이었다. 그러나 동작이 너무 느린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백제기행 단원들 중에는 배로 중국을 다녀온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3층 319호에서 322호까지 여장을 풀고 하나둘 뒷갑판에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묵은 3층은 8인실이고 1·2층은 다인실로 중국을 오가는 일명 보따리장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듯 했다. 오후 다섯 시, 울렁이는 가슴과 함께 새만금이 멀어지고 있었다. 선상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언제 중국에 도착하느냐? 330여km밖에 안 되는 거리인지라 다섯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새벽녘에 도착해 아침을 배에서 먹고 중국이 업무를 시작하는 아홉 시에 입국수속을 시작한다는 의견에 모두들 동조하고 있었다. 배의 국적은 한국이지만 직원은 모두 조선족이란다. 어딘지 모르게 무뚝뚝하다.
서해안 낙조를 선상에서 볼 수 있다는 말에 고무되어 시차까지 계산하며 한참을 기다렸으나 일몰 직전에 구름이 가로막고 나섰다.
저녁 여덟 시, 식당에서 기행에 관한 전체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아홉 시쯤에는 청도맥주를 손에 들고 배 한쪽에 모여 앉았다. 전자는 조법종 교수님이 진행하는 기행에 관한 학습이었다면, 후자는 정웅기 사장님이 단장으로 추인되는 자리였다. 맥주 값의 출처가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청도맥주는 100년 전 맥주의 원조 독일이 청도를 점령하며 들여온 맥주로 중국에서는 최고란다. 파도에 몸을 맡긴 세원1호와 함께 그 옛날 범선으로 이곳을 오갔을 선조들을 떠올리기도 하며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공자님을 만나러가는 첫날밤은 이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4일 아침에 눈을 뜨니 일곱 시가 조금 넘었다. 우리의 초딩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시끄러운 걸 보니 배 위의 아침이 무척 즐거운가 보다. 멀미에 시달린 사모님들에게는 긴 하룻밤이었을 것이다. 배멀미를 경험한 분에 의하면 한 번 시작하면 모두 비우지 않으면 안 된단다. 조금이라도 남겨두려고 하면 끝까지 더 고생이란다. 비움의 철학까지도 배에서 함께 공부한다. 주위를 돌아보니 망망대해, 아직도 멀었는가 보다. 예상대로라면 밖에 중국 땅이 보여야 할 텐데… 속도가 20노트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굼벵이가 기어간다는 표현이 맞을까? 그래도 밤새 파도가 심했다는데 우리를 무사히 데려다 준 이놈이 고맙다.
오전 열 한 시가 되니 커다란 환영 간판과 제법 높은 빌딩이 보이기 시작한다. 군산을 떠난 뒤 열여덟 시간이 걸렸다. 하선할 준비를 하는데 점심식사로 간단한 국수를 무료로 먹여 준단다. ‘맛있는 점심이 청도에 예약되어 있다던데…’ 알아보니 배의 승선인원이 300여명이나 되기 때문에 입국수속을 하다보면 중간에 점심시간이 시작되므로 관리들의 점심식사 후 입국수속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신문방송에 날 일인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게 중국의 만만디인가? 사회주의 국가라면 인민이 먼저 아닌가? 꼬박 한 시까지 기다리며 중국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공자님 동네까지 6시간
난생처음 밟아보는 중국 땅. 기온은 선선했고 그리 낯설지 않았다.
어릴 적 보던 삼륜차가 가장 먼저 정겹게 다가왔다. 웃옷을 벗고 다니는 남자들과 공안(경찰)들이 보인다. 청도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해변도시로 인구 700만이 넘는 경제활동이 가장 활발한 도시 중 하나란다. 주점(酒店)들이 꽤 많다. 술집이 아니라 식당이나 여관을 가리킨단다. 대기하고 있는 청도관광 버스에 오르니 가이드가 반갑게 맞이했다. 자신을 길림성 연변출신 조선족 정미란이라고 소개했다. 나이는 26세, 발레를 전공했단다. 우리가 어린 시절 시골에서 쓰던 단어와 속담들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예쁜 아가씨였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하고 자라서 그런단다. 배가 늦어져 맹자의 고향인 추성의 맹묘와 맹부를 가 볼 수 없다고 한다. 언제 다시 이곳에 와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서운했다.
공자의 고향 곡부로 바로 이동했다. 고속도로로 저물어가는 들판을 지나갔기 때문에 중국이 실감나지 않았다. 소박한 고속도로 휴게실. 간간히 만나는 2층 버스. 2층은 침대란다. 기사아저씨는 시속 90km를 준수한다. 고속도로 주변의 빈 땅에는 모두 포플러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황사예방용이란다. 긴 버스여행이지만 가이드의 입담과 조법종 교수님의 이어지는 설명, 그리고 단장님의 구수한 이야기가 청량제 구실을 하여 지루하지 않는 6시간이었다.
6시간 후 21시, 어둠이 짙게 깔린 후에야 궐리빈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국식의 고풍스런 기와지붕으로 조명을 받아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내부로 들어가니 호텔을 다녀간 유명인사들의 사진을 통하여 호텔의 위세와 역사를 자랑하는 듯 했다.
여장을 풀고 두 번째 중국식을 먹는다. 이름은 모르지만 낯설지 않은 탕수육을 비롯하여 8가지가 나온다. 밥은 언제나 나오는데 불면 날아갈 정도다. 준비해간 볶음고추장이 필요 없을 정도로 먹을 만 했다. 맥주는 기본으로 항상 붙어 나오고, 생수는 없다. 차는 무제한 서비스란다. 아무 물이나 먹으면 즉시 배탈이란다. 물을 물 쓰듯 하는 우리나라 금수강산 정말 좋은 나라다. 출발 전 아이들의 식사가 염려되어 김이니 밑반찬을 준비 했지만 그것들은 나중에 어른들의 몫이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늦은 시간이지만 중국의 밤풍경이 궁금해 인근의 야시장엘 갔다. 어두침침한 곳곳에서 연기가 올라간다. 알아듣지 못하는 호객행위. 배부른 탓도 있지만 내가 먹기는 힘들 것 같은 음식들을 펼쳐놓고 그들은 밤을 새고 있었다. 낡은 택시와 자전거 수레가 공존하는 곡부. 늦어가는 밤이지만 그들은 여기저기 뭉쳐서 큰소리로 장난치며 혹시라도 찾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이 어릴 적 시골보다도 더 아득하다.
셋째 날, 공자님을 만나다
오늘은 중국기행의 하이라이트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2곳, 곡부(曲阜)의 삼공(三孔)을 방문하고 태산(泰山)에 오르는 날이다. 삼공은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을 가리킨다. 공자님을 제대로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6시에 기상하여 7시에 식사를 하고 8시에 출발하기로 하였다.
곡부는 800여년 동안 노나라의 수도였으며 공자의 고향으로 유교사상의 발원지이므로 “동방성인의 도시”라고 일컫는다. 도시 전체에 3층을 초과하는 건물이 없는데 이는 공자의 저택인 공부의 높이가 2층으로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건물의 높이가 공부를 초과할 수 없도록 하였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곡부도 공자의 후손들이 철로가설을 반대해 발전이 늦어졌을 것이지만 성인의 고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머문 궐리빈사 호텔의 옆 사거리의 아스팔트 포장도로의 표지판에 ‘문명시범도로’라고 씌어있는 것으로 도시발전의 정도를 가늠해 보았다.
호텔에서 공묘의 입구까지 도보로 5분정도. 자전거를 개조한 삼륜인력거가 아직까지 손님을 부르고, 가는 곳마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물건을 두세 개 들고 천원을 외쳐댄다. 귀찮을 정도로 주위를 에워싸고 서성거렸고, 갓난아이를 안고 작은 목소리로 구걸하는 아낙은 영화에서나 보았음직하다.
중국이 자랑하는 성지 앞에서의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광경을 뒤로한 채 거대한 돌기둥의 금성옥진(金聲玉振)문을 통하여 공묘에 들어섰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가 죽은 1년 뒤에 사당을 세운 것인데 대대로 공자를 모셔오고 있는 곳이다.
들어서자마자 중국말 특유의 다소 시끄러운 억양으로 가이드들의 설명이 여기저기서 빗발친다. 양옆에 도열한 수많은 비석들이 눈에 뜨인다. 황제의 비석들이란다. 물론 공자에게 비석을 내린 황제들은 자기들의 통치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세운 황제들일 것이며 그 이념을 이론으로 제공한 공자에 대한 보은이리라.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는 행단(杏壇)이 눈에 들어온다. 공자가 휴식을 취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란다. 인(仁), 덕(德), 도(道)를 설파하는 공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아니하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도에 뜻을 두며, 덕에 의거하며, 어진 것에 의지하며, 예에서 노닐어야 할 것이다.”
이제 가장 주된 건물인 대성전(大成殿)이다. 여러 가지를 모아 크게 이루었다는 집대성이란 표현에서 나왔다는 교수님의 설명이 있었던 같은데…. 대성전은 북경의 자금성과 우리가 오후에 오르게 될 태산의 천황전과 함께 중국이 자랑하는 3대 건물 중 하나란다. 황궁에나 올릴 수 있다는 황금기와지붕과 용을 부조한 18개의 커다란 돌기둥으로 지은 대성전에는 건물의 위용보다도 더 큰, 바른 정치를 통해 세상을 이끌려 했던 공자의 의지가 묻어 있다. 중원이 혼란으로 들끓던 시기 자신을 알아줄 군주를 찾아 헤매이며 이상정치의 실현을 꿈꾸었고 평생 그의 위상에 맞는 위치에 등용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사상은 정치이념으로서 뿐만 아니라 중국철학사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유산이지 않는가? 세상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를 성인이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음을 감사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희열 그 이상을 느낀다.
대성전에서 눈에 가장 띄는 것이 돌기둥이었다. 지름이 80㎝, 높이는 5.7m로 어자석(漁子石)이라는 특이한 돌에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는데 중국에서 용은 하늘과 왕을 상징한단다. 황제가 사는 자금성 태화전 기둥에도 용을 새긴 조각이 없는지라 청의 건륭제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돌기둥을 모두 천으로 감쌌다는 설명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부침은 있었지만 공자의 위상이 왕에 버금가던 시절이 있음을 실감한다.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황제가 공자에게 내려준 집터로 대대로 공자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공부를 보러갈 차례다. 누각과 대청이 총 463칸이나 되는 역사상 가장 큰 장원으로 성인의 집안이라 ‘천가제일의 가옥’이라고 불리며 여러 천년을 내려오며 존귀와 영화를 누렸다. 공부는 역대왕조가 공자의 자손을 제후로 봉했기 때문에 삼당육청(三堂六廳)을 두었는데 삼당은 역대 연성공의 집무실이고, 육청은 중앙의 육부를 축소한 것이란다.
공림은 공자와 그의 가족들의 묘지로 입구에 1㎞정도의 숲길이 이어지며 좌우에 노점상들이 즐비하다. 우리와 문화권이 거의 같은지라 별로 색다른 것이 없다. 잊혀져가는 그때 그 시절이라 표현해도 될지. 조잡하고 올망졸망하다. 한 할머니가 뭘 달라고 손짓 발짓을 한다. 먹고 남은 물병을 달라는 말씀이란다. 뭐하는데 쓰냐면 빈병에 물을 담아 판단다. 물 한 병에 2.5위안 우리 화폐로 320원 정도로 관광지라 비싸다. 중국은 물 사정이 좋지 않다. 물에 석회성분이 들어있어 먹으면 바로 화장실행이란다. 가이드의 경고에 길가의 물을 사 먹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들고 온 물병이 아까워 그냥 차에 오를 탈정도로 마음이 독하지 못했다. 이곳 물병은 비닐처럼 얇아서 휘어졌다.
숲길이 끝나며 지성림(至聖林)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그 대문을 들어가서 한참을 가니 공자의 묘가 있었다. 공림은 공자와 그의 가족들의 전용묘지로 무덤이 10만여 기, 역대 석의(石議) 85쌍, 묘비 400기, 교목 42000여 그루가 2400여 년간 보호받고 있어 공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가족 묘지란다. 공자묘의 묘비에는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고 씌어있다. 봉분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대 성인의 묘소에 풀은 제멋대로 자라 그대로였고, 나무는 나무대로 묘지 위건 옆이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유교문화인줄 알았던 우리나라의 묘지 습속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지? 잠깐 머리 속이 혼미해 진다. 속빈 지배층이 하릴없이 만들어낸 변종문화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공자님의 묘소가 이럴진대…
오른쪽에는 공자의 아들 공리의 묘가 있고 공자의 묘 앞에는 손자인 자사의 묘가 있다. 묘의 배치는 공자가 아들을 데리고 손자를 안아주는 모습이란다. 표현이 재미있다.
백제기행팀은 여행기간 내내 비를 피해 다녔다. 아니 비가 우리를 피해 다녔다. 버스에 올라타면 비가 내리고, 내릴 때가 되면 미리 멈추었다. 하늘의 축복에 덧붙여 또 하나의 복이 있었으니 이번 기행에 동행하며 강사로 수고해주신 조법종 교수님의 명쾌하고 거침없는 해설이었다. 여행 내내 우리들의 탄성을 자아냈으며 압권이었다. 2,500년의 시간 뒤로 달려간 우리들에게 이렇듯 편안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이드 정 양은 괜히 저만큼 걷고 있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여행팀’이라는 가이드의 말을 빌리더라도 자화자찬만은 아닌 듯싶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태산은 걸어서 올라야 제 맛이라고 걸어서 오르고 내려 올 때도 태산의 장관을 음미하며 모두 걸어서 내려오려고 했으나, 시간관계상 왕복 케이블카를 타게 됐다”는 단장님의 이상한 설명이 있었다. 날씨도 덥고, 별로 높지 않다고 하지만 하늘아래 태산인데 제법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기위하여 중턱까지 가야하는데 관광버스로는 갈 수 없고 24인승 미니버스 두 대로 나뉘어 올라간단다. 여기서 사건이 발생한다. 나뉘다보니 인원점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화장실이 급한 김남규 의원을 태우지 않고 출발한 것이다. 식당으로 연락을 취해 다시 모시러 가는 소동 끝에 태산에서 재상봉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후 출발할 때마다 그분을 1순위로 챙기는 습관이 생겼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들 진현이는 여행 중 가장 큰 추억으로 태산에서 아빠를 잃어버린 것을 꼽기도 했다.
중국산 기계는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이 필자의 고정관념이다. 그러니 중국에서 케이블카를 탄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지만 어쩌랴 태산에 오르려면 이 방법밖에 없는 걸…. 탑승해 보니 오스트리아 원산인가 여하튼 중국산이 아니어서 마음이 좀 놓인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곳이 말로만 듣고, 책에서만 보았던, 열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그 유명한 태산이란 말인가? 태산의 준령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평지에 태산이 우뚝 솟아 “천하제일의 명산” “오악의 으뜸”이라 불리운다. 역사 이래로 수많은 중국인들이 태산등정을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우리도 이국만리에서 그 대열에 합류했으니 이 또한 영광이지 않은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공자가 올라간 공자등림처(孔子登臨處)를 통하리라. 삼대가 호랑이에게 물려가고도 마을을 떠나지 않은 노인을 만나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마을도 보고 싶다. 그 옛날 그 진시황이, 공자님이 올랐던 길을 그렇게 똑같이 걸어보고 싶다.
케이블카로 10여분을 오르니 남천문(南天門)에 이른다. 눈도 가슴도 다 시원하다. 무협소설에서 느꼈을까 아니면 영화에서 보았을까, 태산의 정상인 옥황정까지 도교식 건물이 보이며 돌길이 이어진다. 아이들을 챙겨 사진 찍으랴, 구름과 숨박꼭질하는 태산의 장엄한 모습에 취하랴, 선경에 이른 듯한 착각에 빠진다. 아이들은 자기네끼리 저 만치 앞서서 달려 올라가고 있었고, 이수자 선생님은 발걸음이 조금 무거워 보인다. 조 교수님은 설명하랴 사진 찍으랴 바쁘다. 부인과 함께 오지 못한 김승민 실장은 혼자서 날아가 버리고 없다. 바위마다 새겨 넣은 대서예가들의 필체가 반긴다. 중천문을 지나 옥황정이다. 옥황정은 유교가 아닌 도교의 건물이란다. 중국은 가는 곳마다 도교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유교, 불교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 같았다. 옥황정 안 태산극정(泰山極頂) 1,545m라고 씌어진 푯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큰 솥이 마당 가운데 있는데 그 솥에 붉은 천으로 돈을 매달아 복을 빈단다. 일본의 신사에 가도 중국 태산의 도관에 가도 우리나라 절에 가도 돈이 없으면 복을 빌 수 없는가 보다. 그 돈은 어디로 갈까? 돈 안내고 복을 빈들 어쩌랴. 신이 있다면 마음만 받고 복을 주실 텐데. 일관봉이라는 봉우리에 일관봉빈관이라는 호텔이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태산에 호텔을 지을 수 있는 중국인들의 배포가 가련하다. 하산길에 한국산 소주로 마음의 제를 지내고 모두가 한잔씩 음복하니 황제가 따로 없다.
우리는 중국문명의 발상지 황하로 향한다. 산동성의 수도 제남을 향하여 달리면서 비로소 중국의 시골풍경이 제대로 펼쳐진다. 빨간색 페인트로 칠한 간판들이 늘어서 을씨년스럽다. 중공과 왕래가 없던 시절 이곳에 왔다면 무서움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들의 이동은 거의 보이지 않고 문 앞에 나와 의자 하나놓고 앉아있는 모습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이 오토바이와 자동차의 수리장면이다. 고물들의 천국 같다. 아이들에게 잘 보라고 단단히 일러둔다. 돈 주고도 다시 못 볼 어쩌면 우리들 과거의 모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하 연안에서 붉게 흐르는 황하를 뒤로하고 사진도 찍어본다. 기대가 컸던 탓에 마주한 황하의 모습이 밋밋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중국 역사에서의 황하의 위상과 유구한 역사를 생각하며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대명호를 돌아 표돌천에 도착했다. 제남은 샘물의 도시이다. 표돌천은 물이 좋다는 제남의 72개의 샘 중 으뜸으로 춘추전국시대에는 녹수라고 하였고 옛부터 천하제일의 샘이라고 불렸던 곳으로 3개의 굵은 물줄기가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많은 중국인들이 찾고 있는 이 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거닐다 여섯 시쯤 제남시내의 중호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넷째 날, 중국의 역사를 만나다 - 박물관 답사
오늘은 어제보다 30분을 더 잤다. 박물관이 문을 열기 전 잠깐 짬을 내어 제남의 앞산이랄 수 있는 천불산에 올랐다. 붉은색 천을 나무나 제단에 수없이 두른 것은 아들 낳게 해 달라는 기원이란다. 여기도 아들타령이다. 30여분을 오르니 천불사라는 절에 다다른다. 우리나라 절과 흡사하지만 이상하게 다른 절의 모습. 실제는 100여개의 부처가 있다는데 이름은 천불사다. 가는 곳곳 향불을, 그것도 나무젓가락보다 굵은 것을 주먹만큼 모아 피워댄다.
산동성 박물관에 도착했다. 1954년에 건설된 수장문물 중국 7위의 박물관으로 석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과 제나라, 노나라 때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명나라 시기의 배가 관심을 끌었다. 배를 촬영하려고 안내원에게 허락을 받아 셔터를 눌렀는데 자동발광이 되자 즉각 안내원이 달려와 제지한다. 목례로 사죄를 하고 넘어갔다. 객지에 와서 충돌은 피하는 게 상책 아닌가? 이른 시간이기도 했지만 큰 박물관에 관람객이 우리 뿐이었다. 그래도 교수님의 설명은 재미있고 진지했다. 기전중 이혜경 선생님은 처음부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은 분량이 상당하다. 나중에 시험문제 내려나?
어른들은 유물실에 남고 학생들을 임치현에서 출토되었다는 4,5십만년 전의 고생물 화석과 공룡이 전시되어 있다는 공룡관으로 먼저 보냈다. 고대 유물의 주류는 제사의식에 쓰이던 제기로 크고 작은 술잔이 많았다. “제기에 담겨진 술을 통하여 신과 하나가 되는 의식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였다”는 설명 이후에 우리들이 마시는 술이 접신주로 격상되었다.
이제 발길을 돌려 강태공(姜太公)을 만나러 간다. 위수 강변에서 바늘 없는 낚시질을 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강태공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주나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공으로 제나라의 시조가 된 전설적 인물로 10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자손이 40여개의 성으로 퍼졌다는데, 우리나라 노(盧)씨도 강태공의 후손이란다. 전시관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방문사진과 함께 ‘先祖의 높은 뜻을 받드오리다’라고 글씨가 액자에 담겨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중국인의 후손이었던가? 아니라면 강태공이 동이족이었나?
오후에는 임치의 제국고성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불벽돌로 옛 성처럼 쌓아서 이채롭다. 좀 어렵다. 제나라의 역사가 주류를 이루는 것 같았다. 선제시기와 주나라, 춘추전국, 진한의 문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축구의 원조가 영국이 아니란다. 임치는 그곳이 축구의 발상지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중국이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축구 종주국으로 공인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차는 모습의 조각, 벽화 등의 유물이 10여점이 별도로 전시되고 있는데 그 섬세함이 지금의 축구와 흡사함에 놀랐다. 마지막으로 연주실에서 편종과 편경의 금성옥진(金聲玉振)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한 중국소녀가 가야금과 비슷한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관람하는 영광을 안았다.
예정을 앞당겨 양가부민속촌을 오늘 관람하기로 하였다. 말 그대로 양씨성을 가진 사람들의 마을이다. 유명한 중국의 연이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연을 손으로 만드는 직원들은 모두 여자들이었다. 분업을 통하여 섬세하고 거대하며 화려한 온갖 종류의 연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더러 연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민속촌에 명대의 가옥을 보존한 곳이 있다하여 직접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이제 네 번째 밤을 묵을 유방에 도착하여 부화호텔에 들어갔다. 호텔들은 모두 깨끗하고 포근한 게 마음에 들었으며 걱정했던 물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군더더기 쇼핑이 없고 잠자리와 먹거리는 최고를 추구하겠다는 김 실장의 공언에 허언이 아닌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몇몇 사내들은 김 실장의 독방에 모여 그동안 촬영한 조 교수님의 사진을 노트북을 통하여 관람했다. 백주를 접신주 삼아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아쉽게 보냈다.
아름다운 칭따오!
청도는 경제중심도시이자 항구도시이고, 역사문화도시이며 아름다운 관광지이기에 우리나라의 어느 도시 못지않게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독일식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이 보였으며 여기저기 건축개발 공사현장이 많았다. 가이드의 말을 빌리자면 이곳 청도에서 자동차와 아파트는 가격이 우리나라와 비슷하단다. 우리나라 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어 이곳 사람들의 상당수를 먹여 살리는 한국은 상당히 인기가 좋은 나라란다. 예전엔 조선족이 소수민족으로 천대를 받았지만 모국이 잘살게 되니까 중국어와 한국어를 함께 구사할 수 있는 조선족을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한다. 가이드 정 양은 딸만 둘 있는 집의 맏딸로 길림성 연변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이곳 청도로 내려와 당차게 살고 있다. 어디에 사느냐가 아직까지 신분의 상징처럼 되어있고 이곳 청도에서도 공안이 수시로 민증을 검사하며 신분이 불확실할 때는 쫓아낸다는 설명에 묘한 기분을 느낀다.
청도의 동해안 도로를 드라이브하며 청도의 상징인 잔교(棧橋)를 보았고, 중국 5.4운동의 도화선이 된 5.4광장을 볼 수 있었다. 청도를 한눈에 내려다보기 위하여 소어산 공원엘 올라갔으나 교통이 통제되고 있었다. 중국은 아직도 당에서 사람이 나오면 그 일대를 통제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남은 시간을 허비하랴. 독일총독관저로 향했다. 100여 년 전 독일이 청도를 점령하였을 당시 총독이 청도의 경치에 반해 각종 자재를 독일에서 직접 실어와 지었으나 총독 자신은 살아보지도 못하고 본국으로 소환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전혀 뒤지지 않을 만큼 웅장하며 아름답다. 중국 공산당 이후에는 당의 고급간부들이 휴양지로 사용하였다고 그 당시의 유품과 사진이 진열되어 있었다.
점심식사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경복궁이라는 식당에서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로 오랜만에 뱃속을 달래주었다. 우리나라 학생들과 관광객들이 주류를 이뤘다. 요즈음은 학생들이 방학 동안 일본으로 가지 않고 중국 탐방을 많이 한단다. 분위기에 편승해 많이들 다녀오는데 정작 제대로 교육받은 강사가 없어 잘못된 교육을 받은 중국 가이드의 설명을 사실인양 믿을 우려가 있다는 조 교수님의 탄식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태산의 정기를 품고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태풍 때문에 배가 도착하지 않았으면 출항을 못할 수도 있다며 가이드가 전화를 걸어본다. 다행히 세원1호는 청도항에 정박해 있단다. 여권을 잘 챙기라는 주의를 수없이 듣는다. 친절을 가장해 짐을 들어다 달라고 하는 사람을 조심하라. 밀수품이나 마약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청도항은 언제나 보따리 장사꾼으로 넘쳐난다. 1인당 소지한도를 가득 채워 실어 나른다. 한국으로 또 중국으로. 중국에서의 출국수속은 까다롭지 않다. 얼마를 사가던지 외화획득인 걸 굳이 막을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배에 승선하자 멀리서 올라오고 있다는 태풍의 여파로 항구에서부터 배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올 때는 멀쩡했던 아내는 물론 딸까지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고 저녁밥도 먹지 못한다. 벌써부터 저러면 이 길고긴 밤을 어이 견뎌낼꼬 생각해도 묘책은 없어 보였다. 마음과 몸을 비우고 누워있는 수밖에는… 다시는 배타고 여행가지 않는단다. 그러나 어찌 세상일이 딸의 생각대로만 될까 생각하니 먼 훗날 배를 타고 멀미할 한 여인이 그려진다.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딸아!
비는 억수로 내리고 파도가 심하게 밀려왔다. 굼뱅이 같은 세원1호는 묵묵히 대한민국을 향하여 물길을 가르고 있었다.
장하다! 백제기행 101번째.
8월 8일 오후 한 시에 군산항에 도착했다. 파도 때문에 20시간이 걸린 것이다. 보따리 장사꾼들과 어울려 입국수속을 받느라 두 시간이상 지체한 것 같다. 우리세관은 비교적 까다롭게 입국절차를 진행하였다.
여객터미널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아 100m 정도 주차장까지 이동하기로 하였다. 여행기간 중 처음으로 맞아보는 환영의 소낙비였다. 이동 할 때는 내리던 비도 도착하면 멈추곤 했는데… 모두가 버스에 올라 마지막 인원점검을 끝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8월의 태양이 되었다.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한 배를 탔던 모두에게 감사할 뿐이다. 그 넓은 대륙 중국의 코끼리 발가락 몇 개를 만져보고 왔지만 2005년 8월, 5박6일의 101번째 백제기행은 모두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