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9 |
<경기전2>태조 어진 그 수수께끼
관리자(2005-09-08 17:20:22)
태조 어진 그 수수께끼
글 |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5월 17일 111년만에 처음으로 바깥나들이를 한 태조 어진이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서울 나들이 중이다. 경기전(慶基殿)이 태조 어진을 모신 건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사실 태조 어진을 대면하게 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조선의 창업주로서 500년이라는 세계 제일의 단일왕조를 열었던 분이기에 그 권위만큼이나 일반인들이 손쉽게 드나 들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경기전은 세워진 이래 줄곧 국가의 관리 하에 있었으며, 일제시대에는 민족정신이 유지 확산되기를 거부했던 일제에 의해 일반인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해방 이후 조선왕실의 권위와 국가 ‘조선’의 정신적 지주 보다는 전주이씨의 배향공간으로서 문화재 가치로서 유지 관리되면서 배향이 있었던 날을 제외하곤 경기전내 정전(正殿)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정전이 문이 열린 것은, 1998년의 일로 전주의 문화정체성 수립과 활용에 대한 전주시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었다. 당시 전주시는 태조 어진의 일반인 공개에 대비하여 모사본을 제작 전시하고 원 태조 어진은 박물관으로 이전 보관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었다. 1999년 전주시는 권오창 화백에게 경기전의 태조 어진 모사를 의뢰하였고, 모사본이 완성되자 풍남제를 기하여 태조어진봉안례를 거행한 뒤 경기전에 봉안하였다. 그렇지만 태조 어진 원본은 그 자리에 그대로 모셔졌으며, 모사본은 어침실 문 앞에서 일반인들을 만났다. 경기전의 정체성은 태조 어진에 있으므로 경기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전주이씨 대종회의 강력한 의견을 존중한 결과였지만, 어침실에 갇힌 모양은 여러모로 좋지 않은 것임에 분명하였다.
경기전 정전의 어침실로부터 벗어난 것은 국립전주박물관이 5월 17일부터 6월 30일까지 개최한 “경기전과 태조 이성계 왕의 초상” 특별전 때문이었다. 역대 조선왕실의 초상을 포괄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들은 태조 이성계 어진의 권위에 담긴 조선의 정신은 물론 미적 아름다움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특별전에 나온 태조 어진의 자료들을 보면 채색기법이나 사용 안료, 디자인 등 회화사적 특징들 못지않게 궁금증을 자아낸 것들이 있었다. 의문의 시작은 태조 어진을 찍어 놓은 일제시대의 사진들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초상이 처음 제작된 것은 조선시대가 아닌 고려시대였다. 1389년 고려 공양왕이 왜구 토벌 등 이성계의 공적으로 치하하면서 그의 초상을 벽화를 그리도록 한 것이다. 조선의 왕으로써 초상이 그려진 것은 왕위에 오른지 7년만인 1398년으로, 태조 이성계는 그해 2월 함주(咸州, 함흥)의 준원전(濬源殿)에 자신의 진영을 봉안토록 했고, 8월에는
계림(鷄林, 경주)의 집경전(集慶殿)에도 봉안하도록 하였다. 전주 경기전에 태조 어진이 봉안된 것은 태조가 승하한 2년 뒤의 일로 1410년 때이다.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경주 집경전의 어진을 모사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문소전(文昭殿), 장생전(長生殿) 등에도 태조 어진이 봉안되었다. 이처럼 태조의 어진이 여러 곳에 봉안된 것은 조선왕실의 권위와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다소 정치적 의도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ㆍ정유왜란의 피해는 태조 어진에도 불어 닥쳤다. 7년 동안의 전쟁으로 전주 경기전의 어진과 함흥 준원전의 어진을 제외하곤 모두 소실되어버린 것이다. 경기전의 어진은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1593년 우리고장이 선비들에 의해 피안의 길에 올라 전란을 피했으며, 어진만 1614년 전주로 되돌아 왔다. 20여년만에 환안(還安)된 어진은 1688년 서울 영희전에 모실 어진제작을 위해 서울로 나들이를 하였고, 1767년 전주성을 휩쓴 대 화재 때에는 전주향교로 잠시 피신하기도 하였다. 수백년을 흘러내려온 어진은 세월의 풍상을 견디지 못하고 낡고 헐어서 1763년 한 차례 수리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1872년 새로이 제작되기에 이르렀고, 1410년의 어진은 세초(洗?)한 후 백자 항아리에 넣어 본전 뒤 북쪽 계단 위에 묻혔다고 한다.
이런 어진의 제작 과정을 생각하면서 <사진 1>을 보도록 하자. <사진 1>은 함흥 준원전에 모셔진 것을 1913년 촬영한 것이다. 준원전 어진은 경기전 어진과 함께 왜란의 전란을 피했던 것이기 때문에, 1398년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경주의 집경전 어진 역시 동일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주 집경전의 어진을 모사한 전주 경기전의 어진 역시 <사진 1> 속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모습이어야 마땅할 것인데, <사진 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주 경기전의 어진은 노년의 모습으로, <사진 1>의 어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노년의 이성계 어진은 현존하는 태조 어진 사진 중에 유일하다. 왜 그럴까 ? 역대 조선 왕들의 어진은 창경궁의 선원전에 모두 모셔져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소개된 뒤 화재로 인해 모두 불 타 없어지거나 타고 남은 일부분만이 전하고 있다. 때문에 존재유무를 알 수 없는 함흥의 준원전을 제외하면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은 1872년에 새로 제작된 경기전의 어진뿐인 셈이다. 경기전 어진은 1410년 제작된 것과 1872년 새로 제작된 것 2종류이므로 노년의 모습으로 제작된 시기 역시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다만 태조 이성계가 1335년에 태어났고, 처음 제작된 것이 1389년, 준원전에 어진이 모셔진 것이 1398년이므로 당시 이성계의 나이는 54세와 63세였다. 제작 당시의 나이를 감안한다고 해도 <사진 1>과 <사진 2>에서 느낄 수 있는 나이는 아닌 듯하다. 500년의 세월을 지켜 온 조선왕조 창업주의 권위가 필요했을까? 흰 수염의 태조 어진은 분명 젊은 모습의 태조 어진에 비해 일반인들이 범접하기 힘든 조선의 정신이 묻어나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