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9 |
저작인격권
관리자(2005-09-08 17:18:28)
주인 없는 대중가요 가사
필자가 위원으로 있는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에는 차마 그 전모를 밝힐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사건이 종종 발생한다. A(신청인)는 20여 년 전 모 방송사로부터 의뢰를 받아 스페인어로 된 멕시코 가요를 번역하였고, 그 노래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명가수 B가 불러 히트를 치게 되었다. 최근 음반가게에서 자신이 만든 노랫말에 작사자가 B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A가 B를 상대로 저작권침해를 이유로 수천만 원의 손해배상청구를 해온 것이다. 조정 당일, 노래만큼이나 넉넉한 마음을 가졌던 가수 B는 자신의 매니저를 대리출석하게 하면서, 그를 통하여 이 곡의 작사자는 자신이 아니며 왜 그동안 자신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는지 모른다고 순순히 백기를 들고 나왔다.
저작자가 자신의 저작물에 실명이나 예명 등을 표시할 권리인 “성명표시권”은 저작인격권의 한 내용인데, 저작자의 일신에 전속되는 권리로서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상속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오로지 저작자의 사망과 동시에 소멸하게 될 뿐이다. 위 사안에서 원작사자인 A가 생존하여 있는 기간, 그 곡에 자신의 이름(예명)을 작사자로 표시할 권리는 소멸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므로, 사실과 달리 작사자로 표기된 것은 불법적 상태에 있는 것으로 된다.
20여 년 이상 작사자가 잘못 표기된 것을 왜 방치하여 두었느냐는 조정위원들의 질문에 대해 A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였다. 그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면 그는 왜 자신의 이름을 떳떳하게 작사자로 밝히는 대신 예명을 썼을까? 그리고 왜 이제 와서 자신의 곡이라고 나타난 걸까? 대답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대중가요의 가사를 쓴다는 것을 자랑스러운 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중가요 가수하면 딴따라라고 불렀다. 그런 가요의 노랫말을 만든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레 여기지 못하고 실명을 밝히지 않았던 것은 당시의 사회상을 말해준다.
시대와 불화했던, 그리하여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Starry Starry Night)”을 소재로 만든 팝송, “빈센트”의 노랫말은 필자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고흐에 대한 미술평으로 가장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수 “돈 맥클린”이 직접 만들었다는 이 노랫말은 고흐의 그림 못지않은 아름답고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글을 쓰는 동안에도 필자는 빈센트를 듣고 있다. 그림을 보지 않고 노래만 들어도, 해가 막 진후 짙은, 검정에 가까운 파란색 하늘에 콕콕 박혀 있는 별이 보이는 것 같다. 노랫말처럼, 그의 사랑스러운 손에 지친 얼굴들이 위로받고, 쾡한 그의 파란 눈은 내 영혼의 어두움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본 그는 시대와 화해할 수 없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그가 말하려는 것을 사람들이 들으려 할까…
저작권법에 따른 거액의 저작권료 때문에 숨어 있던 대중가요 작사자들이 수면위로 오르는 것 같아 다소 씁쓸하기는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좋은 시가 대중가요의 가사로 쓰이고, 대중가요의 가사를 작사하는 것이 숨길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문학 또는 예술활동이 되는 날이 우리에게도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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