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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9 |
<남원>사랑 노래와 전란의 아픔 가득한 남원
관리자(2005-09-08 17:04:24)
사랑 노래와 전란의 아픔 가득한 남원 지리산 품안에 안겨 있으면서 백두대간 종주의 출발지이기도 한 남원은 예술과 역사의 고장이다. 남원은 춘향전, 흥부전, 혼불로 대표되는 문학의 고장이고, 동편제 판소리의 태터이며, 만인의총이 모셔진 전란의 고장이기도 하다. ‘춘향전’과 광한루원, 사랑의 춘향제 산이 깊으면 품어내고 싶은 것도 많은가 보다. 그만큼 할말이 많다는 뜻이다. ‘춘향전’은 고대소설의 대표작이며, 판소리 12마당의 하나이다. ‘춘향전’은 처음 판소리로 생성되어 불리다가 나중에 소설로 정착되었다. 원각사(圓覺社) 이후에 창극이 되었으며, 그 뒤에 신소설, 희곡, 연극, 영화, 시나리오, 뮤지컬, 오페라의 대본 등 다양한 장르로 개작되었다. ‘춘향전’의 주제는 사랑이다.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신분을 초월한 사랑, 신분적 제약 극복의 의지가 담겨 있는 사랑이다. 그리고 흔히 ‘춘향전’에 표현된 사상으로 계급 타파나 신분적 저항 또는 근대적 자각 등을 말하기도 한다. ‘춘향전’의 배경인 광한루는 누각이고 누가 있는 정원을 광한루원이라고 한다. 광한루 앞에는 신선사상이 반영된 영주섬, 방장섬, 봉래섬이 있고, 그 옆에는 유명한 오작교가 있다. 광한루 왼쪽 편으로 30여기의 비석과 춘향 사당이 대나무 숲 속에 있다. 주천면 호경리 구룡계곡에는 춘향묘와 육모정이 있다. 이도령과 성춘향의 사랑을 기리는 춘향제가 매년 5월 5일에 열린다. ‘흥부전’과 흥부마을 ‘전라도와 경상도 얼픔에 흥보가 살았는디’라고 하여 도 경계인 인월의 성산리와 아영의 성리가 흥부마을로 알려져 있다. 두 마을에는 흥부전을 연상시키는 지명들이 많이 있다. 성산리에는 제비가 흥부집을 맴돌았다는 마을 뒷산 연비봉, 흥부가 도승의 말에 따라 집터로 잡아 부자가 되었다는 흥부네 텃밭, 흥부가 놀부에게서 쫓겨나 짚신을 털며 아픈 다리를 움켜쥐고 신세를 한탄했다는 신털바위, 흥부가 제비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놓았다는 연하다리 등이 있다. 성리에도 ‘흥부전’과 관련된 지명과 설화가 있다. 지명으로는 놀부가 부자가 된 흥부에게서 화초장을 얻어 돌아가던 중 쉬었다는 화초장바위, 도승이 흥보에게 잡아준 집터인 고둔터, 흥보가 허기져 쓰러졌다는 고개인 허기재 등이 있다. ‘흥부전’에 등장하는 중심 인물은 흥부지만 놀부가 차지하는 비중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흥부와 놀부는 각기 다른 인생의 자세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흥부를 도덕적 인물로, 놀부를 반도덕적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나 흥부는 가난을 타개할 의지도, 정열도 없이 주어진 운명에만 자신을 맡기는 소극적 인물이고 놀부는 재산을 모으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적극적 인물로 보기도 한다. 춘향가, 흥보가 등은 판소리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지리산의 웅장한 기상을 닮아서인지 남성적이며 거친 듯 한 동편제 판소리가 생겨난다. 운봉 비전마을이 동편제의 탯자리다. 귀신과의 사랑 이야기, 「만복사저포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인데 그 중 남원을 배경으로 한 ‘만복사저포기’가 있다. 이 작품은 만복사 절에서 양생이라는 노총각과 귀신 처녀가 3일간 사랑을 나눈 이야기이다. 귀신 처녀는 왜구의 침입으로 가슴에 한과 슬픔을 지니고 죽은 사람이다. 귀신 처녀와 사랑을 나눈 양생은 처녀를 위해 지리산으로 들어가 그 처녀만을 생각하며 지냈다. 뛰어난 재능을 접어둔 채 방랑을 하며 세조의 정권을 거부하던 김시습이 한가롭게 사랑 이야기나 다루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보다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그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그리워하며 그를 위해 절개를 지키겠다는 자신의 뜻을 우회적으로 풀어놓은 이야기일 것이다. 평범한 주부시인, 김삼의당(金三宜堂) 김삼의당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남원의 조선시대 후기 여류시인이다. 주로 남원에서 활동한 주부시인으로 명문거족의 자녀도 아니고 세인들의 관심을 끌만한 이야기도 없었던 평범한 사람이지만, 우리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김삼의당은 일상적인 농촌의 생활을 부부화애의 시, 자연교감의 시, 농촌생활의 시, 세시풍속의 시로 잘 표현하고 있다. 민속학의 보고, 민족어의 산실 『혼불』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과 풍속사를 10권의 대하소설에 담아낸 『혼불』을 쓰기 위해 최명희는 젊음을 고스란히 바쳤다. 『혼불』은 남원 사매면 노봉마을의 몰락해가는 매안 이씨 양반가를 지키는 며느리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힘겨웠던 삶과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세계를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양반촌인 매안마을과 매안 이씨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들의 거멍굴이 소설 『혼불』의 무대다. 사매면 노봉마을에 혼불문학관이 있으며, 혼불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란의 아픔 간직한 만인의총 남원은 지리적인 여건상 군사적 요충지로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으로 싸움이 잦아 산성이 많은데 남원성과 교룡산성이 대표적이다.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비와 피바위, 정유재란 때의 만인의총, 근대에 들어서는 동학농민전쟁, 현대에 와서는 6.25 때의 빨치산 등이 아픈 상처이며 몸부림이었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을 지키기 위한 남원성 싸움이 치열하였다. 남원은 전라도의 관문으로 왜군이 북상하는데 꼭 확보해야만 하는 매우 긴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선은 수많은 병사들과 백성들이 힘을 합쳐 남원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남원 사람들은 왜군 병력과의 싸움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아야만 했다. 전라병사와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병사 그리고 성안에 있던 주민 등 총 10,000여 명이 죽고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순절한 시신을 한곳에 모아 합장했는데 이것이 만인의총(萬人義塚)이다. 오   리 노래탑 왜군은 남원성 싸움 후 성안에 남아 있던 도자기 기술자인 도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도공, 목공, 인쇄공 등 손재주를 가진 모든 사람을 납치하여 갔다. 심지어는 조선의 도공을 끌고 가서 조선의 도예 기술이 끊길 정도였다. 일본 역사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도공들은 대한해협을 지나 큐수 남단, 지금은 가고시마로 불리는 사쓰마 해변에 도착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심수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400년 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어 오면서도 혈통과 한국의 얼을 꿋꿋하게 간직해왔다. 조선 도공들은 자신들이 한민족임을 나타내는 단군 묘인 다마야마궁(玉山宮)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9월 14일이 되면 큰 제사를 올리는데 이 때 우리 음 그대로 망향의 노래 <오   리 오   리소서>를 부른다. 이 노래는 새로 돌아오는 내일은 오늘과 같이 화평한 날이 되게 해달라는 송축의 노래이다. 이성계의 황산전투와 황산대첩비 운봉을 지나 인월로 약간 가면 왼쪽에 황산대첩비가 있는 화수리 비전마을이 있다. 비전마을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왼쪽에 황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황산은 운봉의 길목에 있는 산이고 운봉 평야지대를 제압할 수 있는 산이다. 고려 말에 함양, 운봉을 노략질하며 인월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장수 아지발도를 이성계가 이곳에서 섬멸하였다. 황산대첩비는 왜구를 황산벌에서 크게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이다. 황산대첩비 건너편 높은 산에는 철쭉이 만발하여 장관인 바래봉이 있다. 바래봉은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바래봉 아래에는 운봉목장의 초원이 펼쳐져 있는데 이국적인 풍경이다. 많은 문화유산이 산재된 남원을 관광의 도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문화관광 욕구와 문화체험의 갈증 해소책, 그리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것들이 문화유산과 연계되어야 명실상부한 관광도시로 거듭날 것이다. 서정섭 |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서남대 국문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국어 양보문 연구』·『남원 지리산 이야기』 등 다수가 있고, 논문으로는 「혼불의 언어특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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