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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9 |
<남원>남원의 정신문화(精神文化)를 되짚어 본다
관리자(2005-09-08 17:03:24)
남원의 정신문화(精神文化)를 되짚어 본다 - 만인정신(萬人精神)을 중심으로 - 한반도의 어머니 성산 지리산(智異山) 기슭에 지리산을 마주하고 자리잡은 남원은 섬진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한반도 남부 중앙 고원이면서도 드넓고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예로부터 천부지지 옥야백리(天符之地 沃野百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유서 깊고 다양한 문화의 고장일 수밖에 없다. 국보는 1점, 보물이 24점, 사적 6점, 중요민속자료 3점, 천연기념물 2점의 국가지정 문화재에다 도지정 문화재로 25점의 유형문화재, 5점의 민속자료, 8점의 기념물, 31점의 문화재자료를 보유한 남원은 전북에서는 물론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문화재의 보고이다. 그러나 이는 유형문화재에 국한한 수치일 뿐이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와 도지정 무형문화재를 각 1점과 6점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보다 중요한 것으로 민족의 정신사를 창출하고 발전시켜 온 정신적 자산에 초점을 맞추면 남원의 위상은 절대적인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정신적 축을 이끌어왔던 불교·유교의 문화유산은 전국 어디에서나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남원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남원을 빼고는 고대소설을 논할 수 없고 남원이 없는 판소리는 없다. 지금은 영락했지만 일본의 도자기 문화는 남원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정신이 ‘오늘이 오늘이소서’의 노래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남원고유의 진정한 정신문화는 전란사(戰亂史)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참으로 남원만의 독특한 유산이다. 남원 고유의 전란사 고려이전 반도 남부 내륙 깊숙한 산간지방인 남원은 언뜻 보면 전쟁과는 관계가 없을 듯한 고장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반도의 북부에서 일어났던 침략전쟁이나 민란 외에는 직간접으로 남원을 빗나간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일본(日本)과 남원의 악연은 참으로 끈질기게 점철되어 왔다. 백제시대부터 섬진강을 거슬러 남원 접경까지 올라온  왜구가 침탈을 자행했었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일본과의 악연은 고려 말부터 시작된다. 금강 하구에서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탈과 만행은 전라·충청 지방의 경계 지방을 휩쓸고 경상도 함양에 이르게 된다.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남원의 병력으로 이를 막으려 했으나 500명의 병력으로 1만5천여 명으로 불어난 왜구를 물리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동원된 것이 이성계 장군이었고 이성계 장군은 운봉의 황산에서 왜구를 소탕하면서 입지를 굳혀 역성혁명의 꿈을 구체화 하게 된다. 이를 음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전주의 오목대 연회였다. 정유년 남원성 전투 조선조의 임진·정유왜란은 국가를 풍전등화의 위기로 내몰았다. 임진왜란의 패전이 곡창인 호남 장악의 실패였다는 분석에 따라 왜적은 영·호남의 관문 남원을 표적으로 삼아 섬진강을 따라 재침을 시도한다. 왜적은 칼 한 번 뽑아보지 않은 채 남원성을 포위하게 되는데 5만6천여 명의 최정예 부대였다. 남원성을 지키고 있던 병력은 명군 3천여 명, 의병과 관군을 포함한 1천여 명 도합 4천여 명이었고, 6천여 명의 민간인과 관리들이 있었다. 전투는 1597년 8월 13일부터 시작 되었는데 추석을 넘긴 8월 16일 남원성이 함락당하면서 1만여 명의 순절로 끝이 난다. 정유재란의 이 전투에서부터 왜적의 코베기가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민간 포로들을 상품화하는 노예상인들이 출현한다. 그러나 남원성 전투에서 가장 기억해야 할 몇 가지를 들면, 첫째, 국토의 방위를 외세에 의존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교훈이다. 남원성 수비의 수장은 명나라의 양원이었고, 이 양원은 남원인들이 사전에 왜적을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둔 천험의 요새 교룡산성을 버리고 평지성인 남원읍성으로 옮겨 패전을 자초했다. 뿐만 아니라 8월 16일의 마지막 전투에서 남원성을 버리고 중국까지 도망갔다가, 도망과 패전의 죄과로 자기 나라에서 사형당했다. 게다가 남원성이 위험할 때 구원하라고 배치한 전주성의 명나라 군사는 끝까지 움직이지 않은 채 전주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또한, 당시 동·서·남문은 명군이, 북문은 전라병사 이복남 장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명군이 지키던 남·동·서문이 차례로 무너져 성내 군·민·관 모두가 이복남 장군이 지키던 북문으로 몰려 이 북문 앞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순절하였다. 국토방위와 향토수호를 누가 맡아 수행하여야 하는가를 오늘에도 교훈으로 남겨주고 있으며 이는 불멸의 진리이기도 할 것이다. 둘째, 5만6천여 명 대 4천여 명인가 아니면 1만여 명의 싸움인가 하는 문제다. 관심 있는 남원 사람들은 흔히 칠백의총은 국가가 관리하는데 만인의총은 왜 도(道)에서 관리하는가를 묻고 있다. 국가의 공적 기관에서는 칠백의총에서는 유명한 장수가 많이 전사한데 비해 남원성 전투는 뚜렷이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전술 ·전략과 작전의 지휘는 승패를 가름하는 결정적 요소다. 그러나 남원성 전투에서 의병을 포함한 4천명의 병력이 왜군의 최정예 부대 5만6천명을 맞아 4일간 남원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전술·전략·지휘에서 완전 실패한 군의 싸움이 아니라 민초들 6천여명이 가세한 전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 민초들의 국토와 향토방위의 목숨을 바친 항쟁이 무시되고 패전을 자초하게 한 지휘부의 인물만 찾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풍토를 그대로 보여주는 참담한 현상이다. 셋째, 남원성 전투는 표면상 패전이었을 뿐 국가와 민족을 건져낸 승전이었다. 남원성 진입 왜군은 좌군이었는데 전주성을 무혈 입성한 우군(경상도 지방으로 온 왜군)과 전주에서 합류했다. 그러나 좌군은 우군을 따라가지 못하다가 우군이 직산까지 진출해 조·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부여의 금강유역에서 호남의 서쪽으로 후퇴한다. 그 이유가 왜군 수행승 경념의 일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남원성 전투에서 치명적 타격을 받았고 부상병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좌군이 남원성 전투에서 우군과 같이 타격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우군과 함께 직산 전투에 임했다면 한양이 온전했을까? 결국 정유재란 역시 왜적의 패배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에는 여러 조건들이 있을 것이나 남원성 전투에서의 치명적인 타격이 세 손가락 안에 든 이유 중 하나였다. 남원성 전투는 마침내 국가와 민족을 백척간두에서 건져 낸 승전이었다. 가장 중요한 교훈은 역사를 잊고 제대로 반성하거나 청산하지 못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가장 절실하게 각인시키는 전투의 현장에 있다. 일제는 330여년이 지난 뒤 그 역사의 현장에서 북문을 헐어내고 남원역을 만들어 우리 선열의 얼을 짓뭉개는 보복을 했다. 역사를 잊고 식민지로 전락한 민족은 이를 막아낼 생각조차 못했었던 것은 아닐까? 동학농민혁명과 일제의 보복 조선조 말인 1894년 동학농민항쟁 때 전라좌도 대도회소가 설치되어 김개남 장군이 남원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금산, 무주에서부터 남으로 순천, 광양, 고흥 지방까지 관장했다.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농민군은 많을 때 7만여 명 아무리 적어도 수천여명이 넘었다. 전봉준 지휘부대도 왜군에 의해 패배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김개남 지휘의 전라좌군도 청주성에서 일본군에 패퇴했다. 그러나 남원의 전라좌도 농민군은 또 다른 전투로 치명타를 입었는데 이는 운봉민보군과 수성군과의 전투에서였다. 민족상잔의 비극 현장이면서 농민군이 참패한 경우다. 그런데 방아치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는 농민군의 후방 거점이면서 마지막 보루일 수 있었던 남원을 잃었다는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순천, 광양거점의 김인배 부대인 영호도회소가 끝까지 항전하기는 했으나 남원을 잃지 않았으면 전봉준, 김개남이 모두 남원에서 재기할 수 있었거나 적어도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어 전개된 남원성 전투에서 수천 명의 농민군이 희생되었다. 농민군 2대 패전 중의 하나였다. 일제는 전라병사 이복남 장군이 왜적에게 치명타를 입힌 정유재란 당시의 남원성 북문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남원역을 만들었다. 남원역사(驛舍)와 만인의총 본무덤 사이를 정확하게 프래트홈으로 잘라 순국의 현장과 무덤을 철로와 철마로 잘라서 차단했다. 330여년이 흐른 뒤의 무섭고도 잔혹하면서 천인이 공로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보복이었다. 임진·정유란에 남원성보다 치열했던 전투도 많았다. 일제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파괴한 무참한 행위도 많았다. 그러나 330여년전 패전의 원인을 거슬러 조상의 얼에게 이토록 혹독하고 처절한 보복을 한 예는 전무후무하다. 이 사실은 구 남원역 부지의 현장을 실제로 답사해보지 않는 한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피 흘려 나라를 지키다가 순절하신 역사 현장을 그 후손들이 70여 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하게 짓밟고 다니게 하였던 것이 일제의 보복이었다. 이후 미군의 남원역, 용성관 폭파나 제국들에 의한 분단의 대가로 제2의 전선이 형성되어 민족상잔으로 피 흘린 지리산에 대한 얘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1597년 정유년 남원성 전투에서 우리들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정신을 우리 남원인은 만인정신(萬人精神)이라 부른다. 이 만인정신이 곧 남원의 정신이다. 이 정신이 동학농민항쟁으로 이어졌고, 이어 남원인 김주열의 4·19혁명 정신으로, 이후 이석규 열사의 노동정신으로 계승되었다. 우리 남원인은 이 만인정신을 살려내야 하며 이 만인정신을 국민정신으로 승화·확대·보급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 단순히 남원인이나 전북인의 책무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피할 수 없고 피해가서도 안되는 사명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외세에 의한 민족상잔의 비극 지리산이 또 하나의 거대한 축을 형성하고 있으니 남원이야말로 극일(克日)을 위한 교육의 성지이면서 평화(平和)를 실현을 위한 각인의 현장이다. 이 정신의 핵이 남원정신인 만인정신(萬人精神)인 것이다. 한병옥 | 30년간 교육 공무원으로 일했다. 남원시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등에서 일했고, 저서로는 『남원지방을 중심으로 한 성곽의 추적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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