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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9 |
[모악산]모악산의 넉넉한 품에 안겨 사는 사람들
관리자(2005-09-08 17:00:27)
모악산의 넉넉한 품에 안겨 사는 사람들 산이 깊으면 이야기도 많은 법이다. 모악산은 깊다. 정상인 국사봉의 높이가 해발 773m, 연면적 42.22㎢로 물리적인 크기로 보자면 고만고만한 산들이지만, 모악산은 물리적인 크기로는 가늠할 수 없는 높이와 깊이를 갖고 있다. 그 깊음으로 사람들을 키우고, 사람들은 또 모악산에 기대어 살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악산을 ‘위대한 어머니의 산’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모필장(毛筆匠) 채주봉(86) 할아버지도 모악산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다. 채 할아버지는 현재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 입구 상가밀접지역에서 ‘금산필방’을 운영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면서 붓글씨 연습을 많이 했지. 그런데 사서 쓰는 붓이 오래가지도 못하고 너무 맘에 들지 않는 거야. 직접 만들어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붓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됐지. 그때가 스무 살이 되던 해였어.” 그렇게 인연을 맺어 평생을 붓과 함께 하게 된 채 할아버지는 이제 전국적으로 유명한 모필장으로 지금도 매일 붓을 만들며 살고 있다. 채 할아버지가 모악산에 터를 잡은 것은 약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부터 미륵부처님을 모시게 돼서, 금산사를 왕래했지. 금산사가 미륵 근본도장이거든. 그렇게 30여 년간을 왕래하다가 30년 전에 아예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됐지. 처음에는 금산사 바로 옆에서 필방을 운영했는데, 그 후로 지금 관리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가,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된거야.” 지금도 모악산이나 금산사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결국 채 할아버지에게 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60여 년이라는 시간동안 모악산을 바라보고 또 늘 함께하면서 지내온 터줏대감이기 때문이다.   “30년 전만해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다니지 않았지. 용화동 마을만 조그맣게 있었어. 근방 사람들이나 조금 왔지 얼마나 왔겠어. 그러다가 내가 이곳에 터를 잡을 즈음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개발도 되고 조금씩 알려지게 됐지.” 하루도 끊임없이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지만, 모악산은 여전히 채 할아버지에게는 아늑하고 따뜻한 ‘어머니 같은 산’이다. 그는 여든이 훌쩍 넘은 지금도 매일 새벽 3시 반이면 일어나, 매일 아침 금산사 미륵전에 가서 기도를 하고 온다고 한다. 채 할아버지가 신앙생활을 위해 모악산에 삶의 터전을 잡았다면, 이희태씨는 종교 연구를 위해 모악산을 찾은 경우다. 그가 하는 것은 증산학, 그 중에서도 순천도를 통해 증산의 업적과 사상을 학문적으로 밝혀내는 작업이다. 그가 증산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학교를 마친 후에도 축구 심판으로 활동하다가, 본격적인 스포츠 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 유학까지 다녀왔다. 그곳에서 그는 지도교수로부터 뜻하지 않게 ‘단군’을 접하게 된다. 스포츠 과학을 공부하는 틈틈이 단군과 동학에 대해 연구하던 그의 관심은 결국 증산학으로 이어지게 됐다. 그리고 그는 인생의 진로를 바꿨다. 1994년부터 귀신사 맞은편에 위치한 백운동 마을에 들어간 것도, “본격적으로 증산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증산과 관련된 여러 종교와 인물이 밀집되어 있는 모악산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모악산은 단순한 산이 아닙니다. 인류역사상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산이에요.” 그에게 모악산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진원지였다. “1990년대 초반부터 해온 연구의 윤곽이 잡혔습니다. 적어도 올해 안에는 그 결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연구의 성과가 결실을 맺게 되면 일찍이 강증산 선생이 예견했던 상생대도의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조각가 최춘근씨가 모악산에 둥지를 튼 지는 11년 정도 됐다. 중인리에서 3년을 작업하다가, 현재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독배마을에 작업장을 꾸렸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이곳에 작업장을 얻었어요. 무엇보다 값이 싸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주 만족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작은 도로 옆에 있는 마을이라 조용해서 좋습니다.” 이곳에 작업장을 마련하기 전까지 늘 모악산을 지켜봐왔던 그는 현재 “사람들 때문에 모악산이 몸살을 앓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송신탑이 들어서고 모악산에 처음 갔을 때였어요.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 소인국에 간 걸리버가 밧줄에 꽁꽁 묶이는 부분이 있잖아요. 마치 그것을 보는 것 같았어요. 인간들에 의해 모악산이 꽁꽁 묶여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죠.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웰빙이다 뭐다 하면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다니다보니, 모악산이 말이 아니에요. 저라도 안다녀야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체육공원이다 뭐다해서 인위적으로 손을 대는 것도 좀 안했으면 좋겠어요.” 종교를 위해, 종교 연구를 위해, 예술작업을 위해, 이들이 모악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모악산이 단순한 산의 의미를 뛰어 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모악산은 오늘도 ‘위대한 어머니 산’으로서 이들과 이들이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들을 넉넉한 품으로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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