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9 |
[모악산]산에서 나온다는 술 이야기
관리자(2005-09-08 16:59:37)
산에서 나온다는 술 이야기
모악산에 술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한 번 찾아가 보리라 마음먹은 지 오래였건만 이런저런 핑계가 적당히 나타나는 바람에 벌써 몇 해가 흘렀다. 그러더니 예상치 않게 내친걸음이 되어 여름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모악산을 찾게 되었다. 상학에서 대원사까지 올라 한 숨 돌리고 곧장 수왕사로 향했다.
수왕사를 물왕이절 또는 무량이절이라 부르기도 했다던데, 물왕이절이 먼저이고 나중에 수왕사(水王寺) 또는 무량사(無量寺)로 고쳐 불렀을 것이다. (뜬금없이 전주 시내 노송동의 물왕멀이라는 지명이 떠오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름이 아깝지 않게 수왕사의 물은 양이 풍부하고 맛이 무겁다. 좋은 물이 좋은 술의 바탕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수왕사에서 모악산의 술이 나온다. 이름하여 송죽오곡주와 송하백일주라 하는데, 오곡주는 발효주이고 백일주는 증류주이다.
술을 빚는 분은 대한불교 화엄종 수왕사의 벽암 조영귀 스님이다. 미리 알리고 찾아간 것도 아니었는데 공양주께 뵐 수 있느냐 부탁을 드리니 차양 모자를 쓴 스님이 손님을 반기며 나온다. 수인사를 나눈 후 토방에 앉아 술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송죽오곡주에는 솔잎, 댓잎과 콩, 팥, 조, 수수, 보리, 찹쌀, 그리고 산수유, 구기자, 오미자 등이 들어간단다. 흔히 오곡이라 하면 쌀, 보리, 조, 콩, 기장을 꼽는다. 조와 기장을 구분할 줄 모르고 다 서숙인줄 아는 나는 기장이 빠지고 수수가 들어가도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찹쌀과 함께 팥을 쓰는 것이 이채롭다. 산중에서 이런 곡식을 일일이 다 갖추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괜한 걱정을 해 본다. 술밥을 쪄서 곡자와 섞어 밑술, 덧술을 만들고 저온에서 숙성시키는 과정은 다른 민속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재료를 배합하는 솜씨와 온도를 유지하는 정성이 술맛을 결정하는 모양이다.
송화백일주에는 곡식, 곡자, 약초와 함께 채취 시기와 품질을 가려 정성껏 채집한 송화가루가 들어간다. 또 술을 내린 다음 100일 동안 재숙성시킨다 하여 백일주라고 부른다. 벽암은 한 철을 넘겨 익히는 것이라고, 한국 음식은 본래 다 익히는 것이 기본이 아니냐고 강조한다. 소나무 뿌리 아래 독을 묻는다고 하는데,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듣고 보니 소나무는 목재와 땔감으로 뿐만 아니라 잎, 순, 꽃가루, 열매를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약으로 쓸 수 있다. 조선 사람의 소나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이만하면 지극하다 할 것이다. 벽암은 명인으로 지정받고 대상을 수상한 역사를 들어 은근히 송화백일주의 위신을 자랑한다. 실제로 송화백일주는 사찰 법주의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송죽오곡주와 송하백일주는 산중 생활로 떨어진 기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진묵조사가 만드셨다고 한다. 진묵조사의 선시에 「홀로 읊는다(自歎)」가 있다.
하늘 이불, 땅 자리, 산을 베개 삼으니
달 촛불, 구름 병풍, 바다는 술 단지 되었구나.
크게 취하여 있다가 일어나 춤을 추니
긴 소매 곤륜산에 걸릴까 그것이 걱정이로다.
(天衾地席山爲枕/ 月燭雲屛海作樽/
大醉居然仍起舞/ 却嫌長袖掛崑崙)
술 냄새를 맡으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조사를 만나게 되었다. 진묵조사께서 오곡주와 백일주를 친히 만들어 드셨다는 설화가 그저 빈 말이 아님은 이 선시를 보아도 확실하다. 벽암은 수왕사에 진묵조사의 자취를 담은 여섯 개의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고 설명한다. 그 중 하나를 여기 옮긴다.
진묵조사가 수왕사에 계시던 때의 일이다. 수왕사에 물구멍이 둘 있는데 구멍 한 쪽에서 쌀이 나왔다. 때가 되어 한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 몫, 둘이면 두 몫, 셋이면 세 몫… 한편, 전주 성안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제 집 곳간에 쌀이 썩어나가도 남의 집 밥을 축내야 성이 차는 욕심쟁이였다더라. 글쎄 이 부자의 곳간에서 야금야금 쌀이 줄어드는 것이었다. 도둑을 잡으려고 부자가 얼마나 안달을 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숨어서 지켜보는데, 쌀알이 개미처럼 줄을 서서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사람 키 한 길이나 떠올라 줄줄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부자가 눈을 부릅뜨고 허우적거리며 따라왔더니 사십 리 쯤 날아온 쌀이 수왕사로 들어가고 있었다. 부자를 깨우치려고 진묵조사께서 신통력을 부리신 것이었단다.
진묵조사의 진영을 모신 조사전 왼쪽에 큰 바위가 있고, 바위 아래 촛불과 향이 늘어서 있다. 마애불이라도 새기면 좋겠다 싶은데 전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밋밋하다. 벽암의 손길을 따라 바위 위에 또 바위가 얹힌 모양을 몸통과 두상으로 그려보니 자연스럽게 불상이 떠오른다. 그 위로 드리운 큰 소나무는 닫집 처마 아니면 햇빛 가리개처럼 보인다. 이렇게 그리다 보면 홀린 듯 끝이 없겠다. 벽암은 이곳이 전라감사가 직접 국태민안을 빌며 제사지내던 자리라고 한다. 거칠게 다듬은 돌기둥이 아직도 단의 한 쪽을 차지하고 있다. 이곳 역시 토속신앙과 불교가 공존하는 그런 자리로 내려온 것은 아닐까 짐작을 해 보았다.
조사는 수왕사의 토굴에 거처하시면서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조사께서 공부하신 자리는 어디일까? 바위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에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면 적당한 크기의 좌선처가 있다. 벽암을 따라 물기 머금은 바위 옆 진달래 밑동을 딛고 올라가 보니 눈길이 시원하게 열린다. 저수지 너머 경각산 등성이와 경복사가 있었다는 고덕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날이 맑으면 마이산, 지리산은 물론이고 가야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안개가 지나가는 산 아래 마을에 손수건만큼 햇볕이 열려 비추고 지나간다. 수왕사는 산 중턱의 좁은 터에 올라앉아 있다. 세 칸짜리 법당과 요사채가 전부이다. 그 위에 조사당이 한 칸 절벽에 기대어 서 있다. 부처님보다 조사를 높은 곳에 모신 것이 흥미롭다. 쌀이 나왔다는 물구멍 옆에도 집터가 있는데 지금은 비어 있다. 그 옆 바위에 정읍 출신 동초 김석곤이 무량굴이라고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진묵조사에 대한 기록으로는 조사가 떠난 200여년 후 초의선사가 엮은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가 유일하다. 당시 전주의 유생이었던 은고거사 김기종이 먼 길을 마다 않고 초의선사를 찾아가 부탁하여 이루어진 유불 합작사업이었다. 차를 아낀 스님이 곡차를 즐긴 조사의 행적을 남긴 것이다. 진묵조사의 사문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없다. 법통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뚜렷한 것도 아니다. 진묵이라는 이름은 오히려 민간의 전설 속에서 살아남았으니, 초의선사가 “이름이 높다고 거친 돌에 새겨 보아야 쓸 데 없고 길을 오가는 행인의 입이 바로 비석”이라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그대로 한 소식이다.
술은 그만두고 물 한 바가지로 다시 배를 채우고 산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