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8 |
[무주]빼어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한 5천년 역사
관리자(2005-08-09 10:09:38)
빼어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한 5천년 역사
무주지방의 인류 역사는 적어도 5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적상면에서 우연히 마제석검(磨製石劍)을 발견된 후 이 지역의 지석묘(支石墓) 조사를 통해서 출토된 석검(石劍)과 석촉의 형식으로 보아 부여의 송국리(松菊里) 석관묘와 같은 성격이므로 년대를 비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주군은 군 전체가 소백산맥의 산악 지대에 속하고 금강 상류가 흐르고 있어 주변에 고동상(高東狀)의 분지,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주변에 민주지산(1242m) 대덕산(1290m) 덕유산(1614m)이 있고 중앙에 적상산(1034m)이 있어 빼어난 경관으로 둘러싸여 그 속에 인간과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무주 고을이 꽃피었다.
문화유산의 자원들
무주 지역에 남아있는 선사 시대의 문화 유적은 대부분 넓은 하천을 끼고 형성된 들판에 분포되어 있다. 안성면 덕천리 상산마을, 부남면 대소리 도소마을에서 발견된 병부(柄部)가 파손된 석검(石劍), 적상면 사천마을 지석묘에서 대량 발견된 석검 석촉, 무주읍 오산마을 밤수골에서 발견된 석검 등은 모두가 전주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76년 안성면 덕산마을에서 발견된 석검은 흑색점판암제(黑色粘板岩制)로 병수(柄首)장식이 없는 유병식(有柄式)이며 릉(稜)을 세우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이 외에도 안성면 장기리 이목마을 도로변 논가에 서있는 선돌은 선사시대의 거석(巨石) 기념물로 본래 7기(基)였다고 하나 지금은 2기만 남아있다. 선돌이 지역의 경계 표시로 또는 원시적 신앙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 옛날부터 이 고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는 문화의 흔적이요 소중한 유물이다.
최근 태권도 공원유치 성공과 더불어 무주에 기업도시 문화관광 레저의 꿈이 현실로 다가와서 부푼 꿈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현재 타지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들은 마땅히 그 발굴지인 무주 서창 박물관에 전시되어 무주를 찾는 모든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자원이 되어야 한다.
적상산 사고지의 유적
우리나라 5대 사고지중 하나로 적상산성(사적146호)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말 이후 조선조에 이르기 까지 역대 왕조의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는 일명 사각(史閣)이라고 하며 선원각(璿源閣)과 실록전(實錄殿)을 두었다.
북방이 위태하여 묘향산의 실록을 옮길 것을 논의하니 광해(光海) 2년 (1610년) 조정에서 삭관을 보내어 이곳 적상산성 안에 사고를 설치하게 하고 실록전을 창건함으로써 무주 적상산 사고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무주현이 도호부로 승격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적상산 사고가 창건된 4년 후인 즉 광해 10년 (1618년) 9월에 묘향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 중 일부를 이곳으로 옮겨왔고 나머지는 인조(仁祖) 19년 (1641년) 사각(史閣) 옆에다가 선원각을 건립하고 그해 12월에 선원록을 봉안했다. 그 후 1910년 한일 합방이라는 국치를 당하여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게 되니 그해 실록도 서울의 왕실 규장각으로 옮겨버렸다.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했던 적상산 사고는 3백여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지내 오면서도 아무런 사고가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실록전과 그 밖의 부속 건물들이 훼철된 채 오랜 세월동안 주초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당국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실록전과 선원각이 최근에 복원되었지만 실록 824책, 선원록 1446책, 의궤 260책, 잡서 2984책의 기록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텅 비어있는 실록전과 선원각에 그 흔적들을 전시하여 무주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최북 미술관 건립
최북(崔北)은 영조(英祖)때 화가로 어릴 적 이름은 식(埴), 자(字)는 성기(聖器), 유용(有用)이며 호(號)는 성재(星齋), 기암(箕庵), 기거재(居其齋)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만년에 이름을 북(北)으로 바꾸고 자를 칠칠(七七)이라 했다. 당시는 이름자를 파자(破字)하여 해석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의 이름 북(北)자는 좌7우7(左七,右七)로 칠칠(七七)이 되며 합치면 북(北)자가 된다. 또한 7을 일곱 번 곱하면 49의 숫자가 되는데 이 숫자는 그의 죽은 나이와도 상관이 있다. 본군 태생이면서도 어느 가계(族系)인가를 알 수 없다. 그림을 그리다가 늦게는 서울에서 책과 함께 숨어 살다가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성격이 괴팍하고 행적이 기이하여 적지 않은 일화를 남긴 기인(奇人)이다.
평소에 김홍도, 이인문, 김득신 등과 교유 하면서 원말4대가(元末四大家)의 한사람인 황공망(黃公望)의 필법을 존경했다고 한다. 그의 화풍(畵風)은 대체로 정선파(鄭敾派) 화풍을 이어받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계통과 남종화(南宗畵)의 2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의 작품 중 지본소묵(紙本水墨)으로 그린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수하관폭도(樹下觀瀑圖), 한강조어도(寒江釣魚圖), 수각산수도(水閣山水圖),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 표훈사도(表訓寺圖) 등이 전하고 있다.
이런 훌륭한 화가가 우리 고장 출신인데도 아직까지 그를 기릴만한 미술관이 없다는 것은 문화예술계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부끄러울 뿐이다. 자랑스런 최북 미술관 건립에 군관민이 힘을 한데 모아 준다면 얼마나 좋으랴.
무주의 전통 민속놀이
무주 지방에는 토속 신앙의 형태로써 마을 지킴이 신앙체인 당산제 등이 마을마다 이어져 오고 있어 전통 민속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구실을 하고 있다.
특히 부남면 대소, 대티, 가정마을 중심으로 250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부남 방앗거리 놀이 ― 일명 디딜방아 훔쳐오기 ― 는 전국적으로도 잘 알려진 전통 놀이이다. 다섯 마당으로 구성되며 한해의 무병장수와 풍년을 기원함과 동시에 신에게 마을을 지켜 주기를 기원하는 거리제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로 전래되어 왔다. 춤, 농악, 제례의식 등으로 곁들여진 지역의 종합적인 민속놀이로 승화되어 가고 있다. 이 외에도 무주읍 내도리 짐대당, 설천면 심곡리 원심곡 산제, 안성면 덕산리 덕곡마을 풍암제, 무주읍 대차리 서면마을 당산제, 적상면 길왕리 산신제, 서창마을 당산제, 사천리 구억마을 당산제, 무풍면 현내리 기(旗)절놀이, 적상면 마산마을 기우제 등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동부 산악지대인 무주 지방의 전통민속 놀이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 우리 고유의 토속 신앙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유재두 | 무주 부남에서 태어났다. 한양대 자치 대학원을 수료하고, <순수문학>에 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41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우수상을 수상하고, 무주문화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국사 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과 무주 문화원 부원장, 무주향토사 연구회장, 부남 방앗거리놀이 보존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