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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8 |
[화랑]역사와 역할
관리자(2005-08-09 09:48:44)
미술의 생산과 유통이 이루어지는 공간 화랑의 탄생은 화가들의 창작의 자유 확보와 뜻을 같이 한다. 사실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인류문화의 절정을 이루었고 인류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미술품들이 양산된 르네상스 시절에도 창작자로서 화가의 신분은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미술사를 빛내고 있는 유명작가들도 대개는 교회나 권력가 또는 르네상스의 동력이 되었던 상업자본가들의 고용인 신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 작품을 제작해야하는 장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등으로 인해 지배계급이 사라지고 민초들로 권력이 대체되고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자유, 평등, 박애라는 근대적 정신이 대두되면서 작가들은 이제 스스로의 판단과 미학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진보사관, 합리주의, 개인중심의 사고방식을 중심으로하는 근대주의, 즉 모더니즘은 이후 오랫동안 서양의 근대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오면서 유럽에서는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시사하는 여러가지 변화들 남녀평등사상, 개인과 사회의 새로운 관계설정, 기존의 사회체제의 붕괴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화가들의 강력한 창작의 후원자(페트론)들이 사라지면서 스스로 작품을 해야 하는 작가이자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연명해야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역할까지 요구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작가는 창작의 자유를 얻었지만 삶의 불편함을 감내해야하는 고단한 직업이 되고 말았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사진이 발명되자 사실적인 묘사가 주였던 화가들의 사회적 효용성은 더욱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전제주의 시대의 상류층들의 유물이었던 아카데미와 살롱중심의 미술품의 감상과 유통체제는 보다 대중적인 화상과 비평가라는 체제로 변모해 나갔다. 따라서 화상은 이윤을 전제로 하는 개인기업으로서, 작가의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형성하고 평가하며 유통시키는 제도의 하나이다. 화랑의 전제는 영리의 추구이나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있다는 점에서 출판업  등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미술현장에서 화랑의 역할은 대단하다. 작가에 의해 생산된 미술품은 단순한 문화적 재화에 불과하다. 이 문화적 재화가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유통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재화와의 교환이 불가피하다. 여기서 화상들은 문화적 재화를 경제적 재화로 바꿔내는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이들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문화의 생산과 소통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때로는 화가들과 의기투합해서 새로운 미술운동의 후원자가 되기도 함으로써 단순하게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의 의미를 넘어서기도 한다. 미술사 속의 화랑과 화상들 화랑과 화상들의 감각과 의지는 때로는 새로운 미술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하고 실험적인 미술활동의 아카데믹한 평가를 이끌어 냄으로서와 미술사의 발전에 한 몫을 하기도 한다. 현대미술의 단초가 된 인상파는 폴 뒤랑뤼엘(Paul Durandruel 1831∼1922)이라는 파리의 화상이 없었다면 미술사에 등재되지 못 했을 것이다. 또 20세기 미술사를 관통하면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피카소 역시 19세기 프랑스의 화상이자 출판업자였던 앙브루아즈 볼라르(1868-1939)와 만남을 통해 그의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1890년 아페넹 가에 처음으로 화랑을 열면서 드가와 세잔, 피카소, 마티스와 같은 무명 화가들의 전시를 열었고 전시를 통해 지속적으로 작품을 판매해 화단에 등단시켰다. 특히 1894년경에 문을 연 라피트 가의 화랑은 당시로서는 실험적이었던 작가들의 유일한 후원자로 자리 잡았다. 그는 천부적인 안목과 비즈니스 감각의 조화를 통해 작가들을 지원해 줌으로써 화상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뒤랑뤼엘 화랑과 인상파 작가, 칸 바일러(Kahnweiler, Daniel-Henry, 1884~1979) 화랑과 입체파 화가들의 관계, 오늘날의 구겐하임미술관의 모태가 된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예술화랑 (Art of This Century Gallery)과 추상 표현주의, 베를린 슈투름 화랑과 표현주의, 팝아트와 레오 카스텔리 화랑과의 관계 등은 미술사에서 새로운 류파가 등장할 때 마다 화랑의 후원과 이해아래 발전해 나왔음을 말해준다. 이후 1955년 ‘움직임’이라는 전시를 개최한 드니즈 르네는 ‘키네틱 아트’의 산파로 미술사에 당당하게 그 이름을 등재시킨 화랑이다. 최근에도 이러한 화랑의 역할은 변치 않고 있다. 20세기 후반 상종가를 치고 있는 영국의 젊은 작가(yBA)들의 성공의 이면에는 제이 조플링의 화이트 큐브의 역할이 크며, 포스트 모더니즘의 성공에는 마리안 굿맨의 노력이, 그리고 20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장르로 각광받고 있는 사진의 경우도 메트로 픽처스나 독일의 쇼틀 갤러리의 혜안이 작용한 탓이다. 한국에서의 화랑의 역사나 역할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봉건주의 시절 그림이란 문인들의 여가였고 취미활동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작품을 사고파는 화랑의 역할은 그렇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동인들이나 지인들끼리 모여 화회를 열고 서로의 그림을 나누는 것이 관례였다. 때로는 종가집이나 마을의 유지가 화가를 초빙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고 이를 나누는 것이 보편적인 그림소장방법이었다. 이후 근대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전시회가 열리면 몇몇 후원자가 그림을 사주거나 작가가 직접 그림을 그려주는 석상휘호(席上揮毫)가 있었다. 화구와 재료등을 파는 화구점에서 그림을 파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 최초의 화랑은 아무래도 해강 김규진에 의해 만들어진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들어야 할 것이다.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가서 사진을 배워 한국에서는 최초의 사진관인 <천연당사진관>을 연 해강은 1913년 <천연당 사진관> 내에 고금서화관을 열어 서화에 관련된 모든 것을 팔기도 하고 알선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비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이후 고금서화관이 번창하자 1914년 그의 조카 김영선으로 하여금 평양에 <기성사진관>을 열게하고 이곳에 <고금서화관>지점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0년대 초 고금서화관은 문을 닫고 말았다. 이후 1929년 현재 종로경찰서 옆 2층에 오세창의 권유로 우봉 오봉빈에 의해 <조선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이 조선미술관은 30년대에 활발해진 화단을 발판으로 10여년 동안 다양한 전시와 해외전 시도 등의 괄목할 만한 활동으로 눈길을 끌었다. 특히 두차례의 “조선고서화 진장품전”과 “10명가 산수 풍경화전”전은 매우 의미 있는 전시였다. 특히 오늘날 흔히 10대가 불리는 한국화가들의 경우도 이 전시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개인 사설화랑의 형태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서 후대에 미술관과 화랑을 혼돈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와 함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강점기에는 화신백화점과 정자옥 백화점(구 미도파백화점) 그리고 미쓰코시(현 신세계백화점) 내에 화랑이 개설되었으나 작품의 판매보다는 대관전시장으로서의 역할에 그쳤다. 광복 후 1947년경 명동에서 문을 연 대원화랑과 이보다 3달 쯤 뒤인 10월에 문을 연 박영달이 세운 대양화랑이 개점하였으나 이내 문을 닫고 말았다.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최초로 상업화랑이 문을 열었다. 조 고약을 만들던 조고약제약회사가 청계천 4가에 천일백화점을 세우자 이곳의 지배인으로 발탁된 이완석에 의해 천일화랑이 백화점 4층에 1954년 7월 개관하였다. 천일화랑은 미술을 전공했던 이완석의 노력과 관심으로 매우 의욕적인 활동을 보였으나, 미술품애호가의 부족과 청계천이라는 비문화적인 환경으로 인해 개관한지 반년도 되지 못해 문을 닫고 말았다. 이후 이완석의 딸인 이숙영이 예화랑을 설립 운영함으로써 선친의 뒤를 잇고 있다.   이후 1956년 서울에 와있던 주한 외교사절과 미국군속가족들이 한국의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서울 아트 소사이어티(Seoul Art Society)를 조직하고 반도호텔에 상설화랑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반도화랑의 시작이다. 반도호텔 내에 6평반의 공간을 무료로 제공받아 시작했지만 이듬해 운영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도상봉, 이유태, 조풍연 등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아시아 재단”에 지원을 요청해 명맥을 유지했고 1959년 화가 이대원이 아시아재단으로부터 운영권을 인수받아 간신히 문을 열고 있었다.  1961년 지금의 현대화랑 대표인 박명자가 반도화랑에 입사하고 한용구가 가세함으로서 작품판매량도 증가하고 이에 따라 1960년대 후반에는 화랑가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점하기 시작했다. 이후 파고동화랑과 수화랑이 반도아케이트에 문을 열었지만 이내 문을 닫았고 반도화랑도 이대원이 홍익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고 박명자와 한용구가 인사동에 자신들의 화랑을 개점하고자 자리를 비우자 몇차례 경영권이 넘어가 결국은 박호열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물론 반도화랑외에도 국립중앙공보원이나 신문회관 화랑 등이 전시공간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1970년에 들어서 미술동네가 활발하게 돌아가면서 본격적인 상업화랑이 등장하여 1970년 4월 현대화랑(박명자, 한용구)과 명동화랑(70년 12월, 김문호), 조선화랑(71년, 권상릉) 진화랑(72년, 유진, 유택환)이 문을 열고 본격적인 화랑의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73년 한용구가 안국동로타리에 한화랑을 개관하여 독립해 나가고 1975년 현대화랑이 사간동에 사옥을 마련하여 사간동 시대를 열기에 이른다. 이런 화랑가의 활황은 경제발전의 결과가 미술계에도 미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동시에 한국화에서 유화로 대중들의 미술품에 대한 기호가 바뀌어 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국화랑사에 남을 명동화랑은 실험적인 미술운동에 헌신한 화랑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오늘을 일구어낸 화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칸 바일러라고 까지 불리운 김문호는 현대미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인해 자신의 부를 탕진하고 불우하게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이후 서울화랑도 실험적이고 젊은 작가들의 전당으로 자라잡지만 불의의 화재로 인해 문을 닫기에 이르른다. 또 1974년 문을 연 견지화랑과 양지화랑도 몇 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후 한국화 전문화랑 동산방(1976년,박주환)과 문화화랑이, 77년에는 선화랑(김창실), 경미화랑과 그로리치(조희영), 태인화랑, 예화랑, 고려화랑, 희화랑, 송화화랑, 미화랑(이난영), 원화랑(정기용), 변화랑, 한국화랑(이승일)등이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강남에 화랑들이 개관하면서 강남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이후 평창동에 화랑가가 형성되고 대안공간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한국화랑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낙후된 화랑문화는 여러 가지 반성을 필요로 한다. 특히 한국미술계의 문제점인 화랑의 대관문제는 작가의 양산 또는 자정능력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심각하다. 자비출판으로 등단한 작가는 작가로서 대접을 하지 않는 것이 문단의 불문율이라면, 화단의 대관화랑을 통한 자비 개인전 출신 화가야 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은 화랑이라는 시스템과는 상관없이 미술동네의 유한계층으로 존재한다. 적자생존이라는 시장의 논리와는 관계없이 작가로서 그들은 여전히 활동하면서 대관화랑과 작가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게다가 미술품을 소장한다는 것 자체를 경원시 하는 한국의 풍조는 화랑의 존재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고 있기도 하다. 문화예술의 애호가이자 수호자인 미술품 소장가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야 말로 화랑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첩경이라 할 것이다. 정준모 | 토탈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전문위원과 전시팀장으로 일했으며, 1996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비평집으로 『한국근대조소의 역사를 찾아서』, 『미술관, 시대를 증거하는 소장품 수집의 기본원리』 등이 있고, 편저서로 『아트 북 아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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