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8 |
바늘구멍, 대롱 그리고 우물
관리자(2005-08-09 09:38:31)
바늘구멍, 대롱 그리고 우물
어느 늙은 첩보원이 지령문을 받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지나가던 자전거와 부딪히면서 돋보기가 깨지고 말았어요. 지령을 읽지 못하면 그는 선을 댈 수 없게 됩니다. 남은 시간은 불과 일각, 대략 십오 분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경험이 많은 그는 손가락을 오므려 작은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을 통하여 한 글자씩 읽어 나갔습니다. 렌즈 없이 사진을 찍는 핀홀 카메라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지요. 바늘구멍으로 세상을 보면, 경우에 따라, 더 선명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냉전시대의 한 어린이 잡지에 실려 있던 것입니다. 요즘이라면 이렇게 나올지도 모릅니다. “어느 노숙자가 복권을 긁으려고 한다. 그런데 지난 밤 뒤척이다가 그만 안경을 깨고 말았다. 방법이 없을까?”
대롱으로 보는 세상도 재미있습니다. 새벽에 떠오를 때, 중천에 솟아 있을 때, 그리고 서산에 질 때마다 태양은 눈으로 보는 크기가 서로 다릅니다. 직경 10 센티미터 정도의 대롱으로 살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이것은 과학입국을 부르짖던 시기의 퀴즈였습니다. 대롱으로 물체를 살피려면 먼저 물체가 있는 방향을 잘 살펴야 합니다. 방향을 놓치지 말고 대롱을 겨냥한 다음 주변 사물의 윤곽을 따라 목표물을 찾습니다. 일단 목표를 포착하면 주변의 사물에 개의치 말고 목표에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그런데 대롱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종종 좁은 소견을 비웃는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옛날 제나라의 명의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려냈다고 하는데, 과장이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어떤 의사가 이미 사망한 환자에게 시술을 하겠다는 편작을 비웃었습니다. 이에 편작이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롱으로 하늘을 보고 문틈으로 무늬를 보는 것 같소.” 20일 만에 환자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대롱이 우물 정도의 크기가 되면 비난의 강도도 비례하여 증가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장자는 잘라 말합니다. 우물 안 깊은 곳에서 하늘을 보는 개구리는 한 가지밖에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늘구멍, 대롱, 우물은 재미있는 차이를 드러냅니다. 바늘구멍은 너무 작아 보기에 힘이 들고, 구멍보다 구멍을 만드는 손이나 카메라 상자에 더 눈길이 갑니다. 대롱으로 볼 때는 초점을 맞추기 전까지 바깥에 신경을 쓰다가 일단 고정되면 빠져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상에 따라서 눈을 떼기가 힘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물 속에서는 바깥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삽니다. 플라톤이 비유로 들었던 동굴과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지요.
시대가 전문화를 요구합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시대의 기업이 전문화된 인력을 학교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문화의 현장에서도 전문화된 일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런 추세가 반드시 바람직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소신입니다. 전문인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 스미스는 핀 만드는 작업을 예로 들어 단순 분업만으로도 작업의 효율이 4.8배 높아진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전문적인 협업체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성과를 이루어 냅니다. 그런데 전문가가 전문화의 함정에 빠지게 되면 그동안의 성과보다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전문화의 함정은 이야기 속의 개구리가 사는 우물과 같아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시야가 좁아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안과 밖을 동시에 살피는 혜안이 필요한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모여 대롱을 휘두르는 광경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습니다.
| 정철성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