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5.7 |
[제100회 백제기행] 지리산,지리산이여!
관리자(2005-07-06 14:15:49)
지리산이 만들어준 아름다운 그림 하나 그 이틀간 우리는 지리산의 품에 안겨 행복했다. 첫 답사지인 천은사에서부터 우리의 축복은 시작되었으니, 바람결에 건듯 실려 온 보리수꽃 향기에 우리는 피안을 보았던 것이다. 화엄사, 칠불사, 연곡사 그리고 태안사를 돌아보며 우리는 세간과 출세간을 넘나들었다. 사실, 갖가지 꽃과 초록만으로도 아름다운 이 유월에, 고즈넉한 산사에서 명강사의 감칠맛 나는 해설을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흡족했을 터였다. 하물며, 지리산 자락에서 살면서 지리산의 그 서러운 역사를 증언하며, 그 자신들 또한 지리산의 역사가 되고 있는 세 시인을 모시고, 그들의 내공을 훔쳐 보았음에랴! 지리산은 말이 없고, 칠불도 또한 설함이 없었지만, 우리들 백회기념 백제기행 일행 사십여 명은 저마다 마음속에 아름다운 그림 하나씩을 안고 돌아왔던 것이다. 백제기행이 일백 회를 맞이했단다. 햇수로 열 하고도 여덟 해째! 그동안 먹여주고 재워주며, 우리의 지적 호기심까지 채워준 그 수많은 날들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유치원생으로 초창기 멤버였던 우리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었고, 그들을 업어주고 토닥이던 형님들은 이제 쉬이 나들이 길에 나설 수도 없는 연세가 되셨나보다. 우리 식구가 잠시 나라 밖에서 살다 와서 한동안 뜸한 사이에 기행 구성원의 세대교체도 있었다. 그러나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 있으니, 천재지변이 없는 한 백제기행은 격월로 떠날 것이고, 『문화저널』은 매월 세상에 나올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전주에는 ‘한 떼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엄혹한 시절 척박한 토양에 문화의 씨를 뿌리고 가꾸어온 『문화저널』 식구들이 그들이다. 이제는 지쳐 나가떨어지겠거니 위태해 보일 때도 많았건만 그 어려운 살림살이를 잘도 꾸려온 징글징글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꼭 끊어질 듯 이어지는 유장한 남도 육자백이 가락을 닮았다. 혹은, 춘향의 절개를 닮은 것인가. 2005년 6월 11일 토요일 오후 2시, 설레임 속에 마침내 백회맞이 백제기행 버스는 에어컨 소리도 요란하게 지리산으로 출발하였다. 비는 오지 않았다. 애초 이번 기행은 버스 두 대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비소식이 있다하여 산행을 취소하고 사찰기행만으로 꾸리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산행팀에 낄 예정이었던 우리 부부는, 저간의 백제기행 기상도를 무시하고 일기예보를 신뢰한 주최측을 원망(?)했다. 억수같이 비가 내리다가도 백제기행팀이 도착하면 거짓말같이 해가 돋았다는 전설을 잊었단 말인가. 세석의 철쭉은 어차피 놓쳤지마는, 반야봉의 구상나무와 노고단의 원추리 군락도 보고, 근처의 숨은 절집도 본다고 하여 흥분했었는데. 그러나 ‘백회’가 무슨 맛인지도 알아보아야겠고 ‘지리산’의 안부도 궁금했었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따라나선 것이다. 지리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부르지 않아도 항상/ 푸른 대답을 보내오’는 ‘오랜 마음 속 벗처럼.’(박두규, 「지리산 1」 중에서)  절집도 그대로였다. 마치 물이 출렁거리듯 살아있는 현판이 아름다운 천은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아, 역시 오기를 잘했지 싶은 것은 나만의 감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선암사 입구의 홍예교만큼 이쁘지는 않지만, 누각이 있어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지나니 음수대가 나온다. 물맛을 보았다. 원래 절 이름은 감로사였듯이 물맛이 좋았는데, 임진왜란 등 전화를 입어 중건하는 과정에서 샘이 사라졌고, 결국 ‘샘이 숨은 절’이 되었다고 한다. 절집의 강연장 구실을 하는 보제루의 편액은 이삼만 선생의 단아하고도 격조있는 글씨였다. 그 앞 계단에 앉아 좌측을 바라보니 바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기와추녀와 홍예문 사이로 정갈한 항아리들. 그런데 저것들은 광명단 항아리일까? 옹기장이 이현배 님의 항아리가 저곳에 놓인다면 금상첨화이지 싶었다. 극락보전 아미타후불탱화앞에 서자 바람이 실어온 은은한 보리수 향기! 전율이었다. “이 향기만 맡고 가도 이번 기행은 의미가 있겠네요.” 우리의 명강사 조법종 선생님의 일갈이었다. 화엄사의 말사인 천은사는 한때 전직 대통령의 전처가 출가 수행하던 곳이었고, 그 영부인이 자주 시주를 했다고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려하던 그와 그의 두 부인들 모두 이제는 불귀의 객이다.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이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으니,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은/ 이슬의 눈’(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중에서)을 지닐 일이다. 말사를 버리고 본사인 화엄사로 올라가니, 마치 바람개비인양 하얗게 핀 마삭줄 꽃이 먼저 우리를 반겼다. 이곳은 보제루의 규모부터 천은사와는 달랐다. 보제루앞 계단에 앉아 눈을 드니, 동서로 서있는 두개의 탑과 층계 위 대웅전, 그 왼편의 각황전과 그 앞의 석등이 이루는 구도가 묘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에 인도에서 온 연기존자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는 화엄경과 모친인 비구니스님을 모시고 왔다고 한다. 각황전 뒤편 산위에는 <4사자 삼층석탑>과 <연기존자 공양탑>이 있다. 효심깊은 연기존자를 기리기 위해 존자의 모친상을 새겨 탑 기단부 안에 봉안하고, 사리탑 앞에는 차를 공양 올리는 존자상을 새겨 봉안하였다. 어머니에게는 진리를 공양하고 부처님에게는 차 공양 올리는 모습은,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경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불교의 출가와 유교의 효도가 다르지 않고, 구도(求道)와 수기(修己)가 다르지 않으며 제도(濟度)와 치인(治人)이 같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방법은 다르지만 정신과 지향점은 같다는 뜻이리라. 화엄사에는 자장율사가 조성한 구층탑이 있다. 원효대사는 해회당에서 신라 화랑들에게 화엄학을 가르쳤으며, 의상대사도 이곳을 화엄종의 원찰로 삼고 거주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의 많은 스님들이 의승군으로 참전하였고, 그 와중에 화엄사의 모든 건물은 왜구에 의해 불타 버렸다한다. 지금의 모습은 임란이 끝나고 복원된 것이다. 피아골 입구의 연곡사 역시,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곳으로 일제에 의해 훼손된 흔적이 많이 있었다. 점점 우경화되면서 역사왜곡에 눈감는 일본 고이즈미 내각, 그리고 시주 돈을 착복하여 신도들에 의해 고소당한 우리의 스님들, 그들은 온전한 정신이 내리치는 죽비소리에 짐짓 귀를 닫은 것일까. 산그늘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경내에서 저녁 예불의 앞자락을 본 것은, 덤으로 얻은 기쁨이었다. 그 뿐이랴. 살아있는 식물도감이며 걸어 다니는 박물지인 시인들과 함께하는 기행은 그 즐거움이 배가된다. 박남준 시인이 살짝 귀띔을 했었다. 각황전 옆에 떨어져있는 흑매실 몇 알을 주워다 심으라고. 이른 봄이면 붉다 못해 검은 뇌쇄적인 꽃이 필 것이라고. 그래 우리 몇은 곧바로 흑매실 쪽으로 달음박질했던 것이다. 알맞게 시장기가 돌 무렵 우리는 화엄사 아래 숙소에 도착하여 맛난 저녁을 먹고 여장을 풀었다. 곧이어 이번 기행의 압권이랄 수 있는 지리산 시인들과의 대화가 숙소 뜨락에서 있었다. 박남준 시인의 어눌한 듯 맛깔스런 사회로 지리산의 삶과 문학이라는 거대담론이 시작되었다. 먼저, 지리산 자락에서 사는 박두규, 이원규 두 시인의 문학 이야기를 들었다. 박두규시인은, 전북 작가회의가 석간수처럼 믿고 내세울 수 있는 시인으로 소개되었다. 「유배지의 풀꽃」과 「빨치산 아내의 노래」 연작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첫 시집으로 『빨치산 편지』(1990)를 상재한 이원규시인은, 곧 『옛 애인의 집』을 발표한다고 한다. “저는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산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언젠가, 세석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능선들에 아주 강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현대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남은 빛을 끌어 모으자, 이윽고 길이 떠오르더라고 박두규 시인은 함축적으로 덧붙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사노맹과도 관계했던 이원규시인은 1998년에 신동엽 창작기금으로 700만원을 받아, 이리저리 외상값 갚고, 서울생활을 청산한다. 나머지 200여만원 중에서 그는 1,450cc 오토바이를 장만하여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그 때 이후로 그의 모터싸이클은 계속 업그레이드되어 거의 할리 데이빗슨 급이 되었다. ‘텍사스 폴리스’라는 글귀가 쓰인 복장까지 곁들이면, 경찰들이 먼저 경례를 붙여올 정도라고 한다  친우들은 그를 ‘지리산 폭주족’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이 시인은 자신의 슬픈 가족사를 담담하게 풀어갔다. 시인의 아버지는 ‘그쪽’의 높은 사람 밑에 있었다. 그는 소위 ‘법난’ 시기에 하필 절집에 있다가, 아무런 신분증도 없어 무장공비로 간주되어 끌려갔다. 당시는 절집으로 숨어든 운동권 잡는다고, 모든 사찰을 뒤지고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던 때였다. 결국 동네 주민들의 증언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자신의 아픈 가족사를 떨치기 위한 발버둥이었을까, 어린시절의 그는 반공 웅변대회에서 군 대표로 대구까지 간 적도 있었고, 표어로 큰 상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지었다는 표어가 너무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오신 삼촌 간첩인가 다시보자’ 뭐 이런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 시인은 지금 지리산에서 만난 여인과 3년째 살고 있다. 이사한 집에 이불과 떡을 선물로 들고 왔던 여인이었다고 한다. 그 이불이 ‘첫날 이불’이 되었나보다. 그래서 지금 ‘늦 시가 터지고 있다’는 이 내공이 깊은 시인을 만난 것에 우리 일행은 모두 기꺼워했다. 단오 날의 초승달 아래 이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사회자는 “시인은 가객이라고도 하지요”라는 말로 자연스레 시인의 노래를 유도해내었다. 그날 우리는 너무도 서정적인 노래,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다. “내 당신을 사랑한다 말 못함은 내 정성 부족함이 아니오. 내 당신을 보고 싶다 말 못함은 내 마음 ...... 봄이 오는 먼 곳으로부터 쌓여져 오는 그리움......” 박두규 시인은 노래도 잘 불렀다. 돌아가신 이광웅 선생님께 배운 노래라고 한 듯한데, 내 기억이 맞는지 자신이 없다. 『사과꽃 편지』 시집을 가진 박시인은 사과꽃과 관련된 노래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밤이 이슥해지면서 하나 둘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늘고, 남은 사람들은 더욱 재미지고 시시콜콜한 얘기로 분위기를 이어갔다. 차가 고장 나서 늦게 도착한 정 씨네 식구들의 노래도 들었다. 찬 밤공기 때문에 결국 자리는 파해지고, 일부 몰지각한(?) 술꾼들은 자기들끼리 방에서 다시 차수를 늘린다고 하였다. 모든 상처받은 영혼들을 자애롭게 품어준 우리민족의 영산, 지리산 자락에서의 밤은 이렇게 깊어갔다. 둘째 날은 운조루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누가 봐도 풍수상의 명당이 틀림없는 집이겠지만, 과객의 눈길을 오래 붙잡는 것은 집 앞의 연못과 아름답게 피어난 수련이었다. 누마루에 앉아 맞는 시원한 바람도 좋았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타인능해’(他人能解) 쌀뒤주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 통나무를 파내어 만든 이 뒤주는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이 하늘같은 양반주인의 허락을 일일이 구하지 않고도 곡식을 얻어갈 수 있는 장치였다. 그러니 윗뜸의 짝귀네, 깡알네도 오고, 아랫뜸 시체 어멈, 개똥이네도 왔을 것이다. 흉년 보릿고개에 부황 든 자식들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을 테니까. 이렇게 과거의 양반 선비들의 다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며 살았던 것이다. 사실, 각종 민란과 동학농민혁명, 6.25등을 거치면서도 운조루가 무사히 230여 년간 버텨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베풀고 사는 마음인 쌀뒤주 덕분이었다고 한다. 칠불사를 향해서 가는 길은 국도 19번,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전라도 실핏줄’같던 섬진강이 이곳쯤에 이르면 피아골의 물, 화개의 물과 합류하여 더 큰 강이 된다. “섬진강에 사는 은어는 7, 8월에는 수박 맛이 납니다.” “저 남도대교를 다들 흉측스럽다고들 하지만, 저거 개통될 때엔 근처 마을 주민들이 다 나와서 잔치하고 그랬어요. 우리는 ‘쌍무지개 다리’라고 부릅니다.” 박남준 시인의 설명을 듣는 사이 버스는 악양의 <매암 차문화박물관>에 도착했다. 악양과 화개는 중국에서 들여온 차의 시배지이다. 이 차밭 주인의 부친 되시는 매암 선생은 1930, 40년대부터 차재배의 전통을 이어오신 분이다. 당시에는 수탈의 현장이던 ‘지리산 임업연구소’ 건물을 지금은 차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차라는 것이 묘해서 대나무밭 옆에서 자라면 그 차는 대향이 나고, 밤나무 밑에서 크면 밤향이 난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만약, 지리산 시인이 없었다면 이렇게 좋은 곳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푸르른 차밭을 바라보며 차 한 잔씩 하고, 담소 나누니 별유천지 비인간이 바로 이곳이었다. 멋진 차밭에서는 카메라 셔터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뜨락 음악회>를 이곳에서 열면 멋질 것 같았다. 칠불사에서는 아자방(亞字房) 외에는 볼 것이 없다고 하더니, 정말 그것은 특이한 온돌방이었다. 방바닥의 전체 모양이 ‘아’자를 이루는데, 방안의 네 구석은 70cm 높은 좌선처이고, 중앙의 십자형 낮은 곳은, 수도 중에 몸을 풀기 위하여 걷는데 사용하는 장소라고 한다. 이 온돌은 한번 불을 넣으면 상하 온돌과 벽면까지 49일 동안 따뜻했다고 한다, 믿거나말거나. 칠불사 입구에는 ‘영지’라는 둥그런 연못이 있다. 여기에는 애틋한 모정의 일화가 담겨있다. 가야 김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아 아들 열을 얻었다. 그중 일곱 아들이 출가하여 이곳에서 성불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불법에 귀의했다지만, 아들이 그리운 것은 인지상정일터. 허 왕후는 아들들이 보고 싶을 때면, 이 영지에 와서 거기 비치는 아들들의 수행 모습을 보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무튼 절은 잘 가꿔져 있었지만, 씁쓰름했다. 5공화국의 실세였던 허 씨네가 자기들의 선조와 연관이 있다하여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원래는 쌍계사의 말사인 칠불암이 환골탈태(?)한 연유이다. 우리는 맛난 산채비빔밥을 먹으러 쌍계사 입구로 갔다. 식당은 절의 옛 출입구인 표석 옆에 있었다. 그 석문 옆에는, 나무를 뒤집어서 뿌리가 하늘로 솟은 모습 그대로 깎은 장승하나가 서있었다. 옥녀와 변강쇠 얘기로 유명한 ‘벽송사’의 장승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쌍계사에는 범패와 불교음악을 집대성한 진감선사의 유택과 부도가 있다는 설명만으로 만족하고, 우리는 연곡사로 향했다. 화엄사의 말사인 연곡사도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임란과 한국 전쟁 때 계속 소실되었다가 1981년 중건되었다. 국보이기도 한 동부도는 언제보아도 아름다웠다. 옥개석에는 목조건축의 2중 서까래와 기왓골이 정교하게 모각되어 있고 암막새, 수막새에는 연화문이 새겨져있다. 상륜부는 날개를 편 봉황이 4마리 조각되어 있는데, 누군가 그 머리만 떼어가 버렸다. 도굴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기는 했다. 도굴과 발굴의 차이는 무엇일까. 도굴은 나만을 위한 행위이고 발굴은 여러 사람에게 이로운 행위이다. 동일한 행위가 어떤 목적으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규정되는 것이다. 동부도비, 북부도, 서부도를 빠르게 둘러보고 기행의 종착지인 태안사로 향하였다. 곡성의 태안사는 통일신라 선종 9산문 중의 하나라고 하는 데에서 짐작되듯, 꽤 깊은 산중에 있었다. 이곳에는 부도 앞에 배알문을 세운 것이 특기할 만했다. 정말, 지금까지 우리는 원없이 부도를 봤다.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리고 우리는 원없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꼈다. 행복한 일탈 끝에는 지리한 일상이 기다리게 마련. “아빠, 집에 밥 있어요?”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전화통화 소리. 일거에 우리는 소혹성 몇 호에서 지구로 낙하해버렸다. 저녁반찬은 뭘 해먹지? 그렇지만, 숙소 뒤편을 산책하다 네잎 클로버를 찾은 미경 씨네 가족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추억이라는 행운의 도장이 아름답게 콕, 찍혔을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