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7 |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관리자(2005-07-06 14:05:23)
카세트테이프의 날들로 시간 여행
태풍이 부는 날, 30대 후반 직딩 사쿠는 약혼자를 찾으러 고향에 간다. 거기에는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늙은 아저씨가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고 옛친구는 스님으로 살아간다. 20년 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던 그는 첫사랑이 남긴 육성테이프로 하여 과거를 현재진행형으로 재생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가 아니라 ‘…나는 듣네’다. 수런거리던 빛으로 가득 차던 그 날들! 물처럼 바라만 보던 키 크고 상큼한 여학생 이키가 고딩 사쿠의 스쿠터에 올라탄다. 그들은 심야방송에 엽서를 보내고 상품으로 받은 워크맨에 목소리를 담은 소리일기를 교환한다. 섬에서 영화 같은 시간을 보낸 후, 방송에 소개된 엽서처럼 소녀는 병을 앓기 시작한다. 여주인공이 백혈병으로 죽는 이야기라면? 뻔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호주의 원주민처럼 세상의 중심이라는 울룰라에 가기를 소망한다. 병도 태풍도 사람의 일이 아니기에 그들은 공항에서 발이 묶인다. 여기서 병든 소녀가 소년에게 던지는 말. “네가 세상에 태어난 후 내가 없었던 적은 1분도 없었어.” 사흘 먼저 태어난 소녀가 태어난 뒤로 소년이 이 빛의 날에 없었던 적은 단 한 시도 없었다는 말. 이제 곧 죽어갈 소녀가 남긴 이 말은 결국, 잊지 말아달라는 것. "1960년 4월 16일, 우리가 함께 있었던 1분을 잊지 않겠다." <아비정전>의 아비가 체육관 매표원 장만옥에게 하던 말처럼 잊을 수 없는 명대사다.
이 영화는 심야 라디오 방송이나 워크맨 등 8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문화적 복고주의에 기댄다. 이제 10분이면 CD 한 장을 굽는 오늘이지만 우리 그 날들을 기억하는가. 턴테이블의 카트리지를 조심스레 LP에 맞추며 지직거리는 소리를 듣던 날들, 더블데크의 좌우를 부지런히 눌러가며 겉 표지에 노래제목을 쓰던 날들을. 이제 테이프를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CD는 원하지 않는 노래는 세모 표시를 눌러 몇 번 건너뛰면 된다. 앙증맞게 작은 MP3 류의 기계음은 아예 내 맘에 드는 것만 들을 수도 있고, 여차하면 삭제하면 그만 아니던가. 그러나 카세트 레코더에 들어있는 테이프 음악은 원하지 않는 음악도 들어야 한다. 그러나 듣다 보면 좋은 곡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지 않던가. 그런 가버린 날들을 발견하는 영화가 <세상의 중심 …>이다.
모든 문화의 인간은 불안하다. 하여, 인저리 타임의 역전골에 열광하고 백화점에서 카드를 긁기도 한다. 그래도 인간은 허기지기에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죽음은 유통기간이 많이 남은 사랑마저 폐기처분 한다. 그래서 영화 속 이키와 사쿠처럼 사람들은 드레스에 턱시도 차림으로 사진을 남기고 마그네틱테이프에 소리를 담는 것 아닐까. 신의 소관인 죽음을 붙들고자, 아니면 되돌리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일 것이다. 죽어 가는 자 잊혀지는 게 두렵고, 살아가야 할 사람은 기억이 두렵기에. 영화 속 중년의 남자는 말한다. “왜 잊게 되는 걸까?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걸까?” 그러나 잊고 사는 것이 인간.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것들을 소설로 영화로 담아내며 빛으로 가득 차던 날들을 꺼내 보이는 것 아니던가. 그렇다. <러브레터>나 <하나와 엘리스>같은 돌아갈 수 없는,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시간들을 추억하노라면 불안에서부터 온순해지는 나를 느낀다.
좀 길다 싶다. 남녀 배우는 예쁘지도 않고. 사진관 할베나 테이프를 전달하는 어린아이의 설정 등도 애를 많이 쓴 듯하지만 복선이 쉽게 드러나는 플롯의 테크닉도 떨어진다. 실내 장면의 푸르고 붉은 조명에다 혼인신고서 이야기는 보는 이에 따라 유치하고, 울룰루까지 찾아가 밝게 웃는 것은 억지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음, 삶이 너무 새것으로 뻔뻔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되시는 분, 옛날에 듣던 테이프를 버리지 못하는 분, 구식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그리운 분들은 지금 비디오 가게로 가시라. 길고 조용한 복도를 오래도록 거니는 것 같은 이 영화를 보노라면 세상의 중심은 몰라도 청춘의 중심이나 기억의 중심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정성시를 사는 전인권이 사랑을 잃고 은주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보고 또 보는 것을 이해할 수도 있을 터.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