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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7 |
작곡가 이준복 교수
관리자(2005-07-06 14:03:05)
음악밖엔 난 몰라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현대음악 작곡가라면 막연히 쇤베르크나 윤이상을 떠올리는, 그야말로 음악에 관한 한 ‘삼순이’ 수준의 지적토양을 갖고 있는 내가 작곡가를 인터뷰해야 하는 것이다. 날씨도 무척 더웠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3층. 방음장치가 된 무거운 문을 밀고 들어서자 의자 위에 뭔가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방임한 상태로 오수에 취해 있는 사람, 작곡가 이준복 교수다. 함부로 몸부리지 않을 것 같은 작고 깐깐한 체구에, 샛길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 것 같은 성실함이 존재 전체에 묻어난다.   연구실 겸 작업실로 쓰이고 있는 작은 방에는 피아노 한 대, 작곡용 컴퓨터와 키보드, 책, 그리고 사방 벽을 빙 둘러서 포스터들이 걸려 있다. <이준복 작곡발표회> 포스터들이다. 흑백에서 컬러로 변화를 거듭한 수십 종의 포스터. 2005년 5월에 가진 발표회가 가장 최근의 것이고 거기에 ‘25회째’라고 적혀 있다. 1년에 한 번씩, 25년 동안 작곡발표회를 해온 것이다. 문>작곡발표회를 스물 다섯 번이나 하셨군요. 우리나라에 선생님처럼 작곡발표회를 하시는 분이 또 계십니까? 답>아마 없을 겁니다. 해마다 거르지 않고 하는 것도 그렇고, 전체 횟수를 따져봐도 그렇고… 2, 3회 차이로 계속 따라오던 작곡가가 한 명 있었는데 얼마 전에 죽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유일하지요. 유일하게 해마다 작곡발표회를 갖는 사람. 평남 평원 출신으로 완주군 삼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재능은 있으나 알아주는 이가 없어 불우했던’ 꼬마 음악천재였다. 외가 쪽의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아 어릴 때부터 악보를 보면 바로 읽을 수 있는 능력과 생각한 악상을 바로 악보에 그려낼 수 있는 재능이 있었지만, 삼례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피아노 한번 구경하지 못했다. 악기가 아닌 작곡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음악이라면 작곡밖에 없는 줄 알았”던 척박한 환경이 한 몫을 했다. 문>재능을 타고난 것이라면 학교 다닐 때 음악은 항상 백점을 맞으셨겠네요? 답>(웃음)악보를 읽을 줄 알았으니까 새학년 올라갈 때 책을 나눠주면 맨 먼저 음악책을 펼쳐놓고 한 장씩 넘겨가면서 노래를 불러보는 것이 낙이었어요. 그중 제일 재미있는 노래를 고르는 것이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지. 음악적 재능이란, 이렇게 악보를 보고 읽을 줄 아는 능력과 더불어서 작곡에 대한 창작능력이 있는 것을 의미해요. 나는 다행히 그것을 타고났던 모양인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인정을 받아서 음악을 시작하게 됐지요. 초등학교 때부터 발양됐던 그의 음악적 재능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로와 연결이 됐다. 교회 집회 때 고등학생 신분으로 지휘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집단으로 부모님께 압력(?)을 행사해서 마침내 고3때 작곡으로 진로를 정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화성법, 대위법 같은 전문수업을 받으면서 1년 간 집중수업을 받은 끝에 그는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입학을 하게 된다.   문>고3때 음악으로 진로를 정하셨다면 음악 분야에서는 굉장히 늦은 출발인 셈인데, 대학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렵지는 않으셨나요? 답>왜요. 애를 참 많이 먹었죠. 다른 학생에 비해 음악공부 연륜이 너무 짧았어요. 고3때 처음으로 피아노를 쳐봤으니 말해 뭣하겠어요. 교회에서 오르간만 치다가 피아노를 치려니까 터치감이 너무 달라서 한동안 애를 먹었어요. 체르니 30번부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당시에는 한곡 한곡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명곡으로 생각돼서 잠을 못 이루고 빠져들 정도였어요. 기악곡을 접해보지 못한 탓에 더 그랬지요. 그렇게 무식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제가. 심지어는 대학 3학년 때 의무 연주회가 있었는데, 무대에 올라가면 다들 악기 튜닝을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왜 바로 연주를 안 하고 쓸데없이 튕겨쌌는지 의문을 가질 정도로, 그렇게 음악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었어요. 제대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그는, 국내도 모자라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동급생들 사이에서 심한 괴리감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특유의 성실성과 음악적 재능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대학 3학년 때 동아콩쿠르에서 입상함으로써 창작 계에 등단한 그는 이후 부지런히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성악과 기악, 관현악, 실내악 등 장르를 불문하는 그의 부지런한 작곡은 300곡에 달하는 성악곡과 130여곡의 기악곡을 생산해냈고, 25번의 작곡발표회라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쌓게 된 것이다. 문>어떤 음악가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답>음… 글쎄요. 서양 고전음악과 현대음악은 완전히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 드리기가 어려운데요. 학교 다닐 때는 브람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것 같고요. 기교적인 면에서는 바하의 테크닉을 많이 부러워했습니다. 현대 작곡가 중에서 굳이 비교를 한다면 미국의 조지크롬과 내 음악이 가장 비슷한 것 같아요. 문>선생님의 음악세계가 신비스럽다는 의견도 있던데요? 답>글쎄요. 너무 싸이컬로지컬한 이야기로 흘러버릴 수도 있는데요. 저는 신과의 교감을 꿈꿉니다. 신의 세계라 하더라도 추상적인 세계가 아니고 실재하는 세계로 이해하고 있어요. 신의 세계는 우리보다 앞서 있으니 음악도 당연히 앞서 있겠지요. 지금 우리 음악이 가고 있는 방향에서 훨씬 앞선 방향일 거라고 유추해서, 최대한 거기에 가깝게 다가가면서 교감을 이루려고 하지요. 그러나 앞을 보고 걸어간다고 해서 늘 진보하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늘 정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초가 탄탄하거나 탁월한 재능이 있지 않는 한, 언제든지 퇴보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바하도 예순이 넘으면서 신작을 내놓지 못하고 기존의 작품을 정리하는 수준에 그쳤다”며 이준복 교수는 자신의 퇴보를 걱정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라고 말한다. 아직까지는, 적어도 뒤로 되돌아가지는 않았다고. 문>좋은 음악이란 어떤 음악입니까? 답>‘좋다, 나쁘다’는 것은 도덕적인 평가입니다. 음악에는 도덕적 평가가 있을 수 없지요. 좋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음악입니다. 저는 그래요. 첫째,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 즉 독창성이 살아 있어야 하고 둘째, 그 창의력을 모든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으면 그것이 아주 ‘엑셀런트’한 음악이라고 봅니다. 또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고요. 아시아 작곡리그 한국분과 자문위원, 한국음악학회 이사, 한국음악협회 전북지회장을 역임한 그는 음악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도 취미도 없다.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어두운 편이다.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작년에 나는 선생님께 큰 실례를 범했다. 방송국 주최로 가족음악 경연대회가 열렸는데 선생님의 직함이 ‘음악협회 전북지회장’인 것만 보고 심사위원으로 위촉을 한 것이다. 동요와 가요가 주를 이룬 아마추어 음악회에 심사를 요청한 것이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100% 거절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대회장에 오셔서 “나는 클래식만 해놔서 대중가요는 잘 모르는데…”하면서 난감해 하셨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함보다는 대중가요를 잘 알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서려 있는 말투. 성격과 인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난해한 현대음악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성품과 외모를 가졌지만 누가 알겠는가, 마음 속에 불같은 예술적 열정을 숨겨 놓았는지……. 문>작곡 발표회를 해마다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작곡만 해놓고 연주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지금 작곡해 놓으면 나중에 누가 연주해 주겠지’, 하고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래서 저는 작곡을 한 후에 꼭 연주발표회를 갖습니다. 대중들 앞에서 연주가 되어야 내 곡의 장단점도 파악하고 대중들의 취향도 알아낼 수 있어요. 그래야 곡이 생명력을 갖고 살아남습니다. 문>발표회를 갖고 싶어도 엄두가 안 나서 못 가지는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요? 답>맞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발표회를 갖기 위해서는 첫째 본인이 계속 작품을 써야 하고, 둘째로 연주를 맡아줄 연주자들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작품을 쓴다고 해도 서울 같은 곳에서는 연주자를 구하는 일도, 연주장소를 얻는 일도 하늘에 별따기죠. 한 회 공연에 수 천만 원이 들어가야 하는데 누가 그걸 하겠습니까? 다행히 전주에는 동료, 후배, 제자들이 많이 있고 연주할 수 있는 공간도 많아서 저는 복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에는 첼로곡들만으로 구성된 발표회를 가질 예정이라는 이준복 교수. 발표회 날짜가 정해지면 연주자들에게 연주연습을 의뢰하고,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3~4개월 정도 집중 연습을 한다. 그렇게 피땀 흘려 무대에 올려놔도 난해한 현대음악을 돈주고 보러오는 사람이 없어서 그의 작곡발표회는 늘 ‘무료초대’다. “내가 열심히 씨를 뿌리는 중이니까 나중에 후세들은 표사고 들을 날도 오겠지요.”라며 웃는 사람. 마지막 질문은 ‘앞으로의 계획’이었다. 답>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늘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라고. 그 말 외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아요. 제가 계획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욕심이 부족해서 그런지 몰라도 ‘살아온 대로 살아가겠다’는 말밖에 드릴 말이 없습니다. 하고 싶었던 것, 좋아하는 것을 실컷 하고 살았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주위에서 저를 많이 부러워하지요. 음악을 좋아했고 음악만 하면서 살았으니… 하느님의 사랑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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