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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7 |
'왕의초상, 경기전과 태조어진'을 마감하며
관리자(2005-07-06 14:01:51)
경기전과 태조어진의 의미 되새겨야 국립전주박물관에서 개최한 ‘왕의 초상 특별전’(2005. 5. 17 ~ 6. 30)의 일차적인 목적은 태조 어진(御眞, 왕의 초상)과 경기전에 대한 학술적인 접근이었다. 전주 시민이면 누구나 전주의 대표적인 명소, 경기전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이에 대한 심도있는 관심과 논의가 미진하였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문화의 상품화, 관광화가 화두인 이때, 차분히 정리하여 새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역할을 박물관이 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특별전의 주인공은 태조 어진이었다. 처음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배견(拜見)한 것이 작년 7월. 초상화 전공 학자 2명, 회화 수복 전문가와 함께 하였는데,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진이 뿜어내는 생생한 색채와 위엄에 모두들 숙연해졌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태조 어진 같은 임금의 초상화가 서울에는 많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명종대 기록에 태조 어진이 26축이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어진은 조선시대에 다양한 자세와 복식으로 그려졌으나, 숱한 전란과 화재로 몇 점 남아 있지 않다. 유존되는 것마저도 부분적으로 소실된 5점 정도의 궁중유물전시관본, 영조어진 반신상(1901년), 대한제국기의 고종, 순종 어진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실정에서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봉안대상과 봉안처, 제작 기록인 의궤(儀軌)까지 함께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어서 조선왕조의 품격과 깊이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어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대중적인 공간, 박물관으로 옮겨 누구나 조선 문화의 기품과 저력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는 것이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보람이었다. 특별전에서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본 관람객들은 다른 어진의 모습이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명작의 깊이를 느낀 사람들의 눈에 범작이 우습게 보이는 이치이다. 이번 전시의 두 번째 초점은 경기전의 의미를 밝히려는 것이었다. 경기전이 조선왕조의 창업자 태조 이성계의 초상만을 모시도록 건립한 곳이며, 이러한 건립의 배경에는 조선왕조의 본향, 전주의 입지를 강조하려는 역사적인 함의가 있다는 것을 놓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특별전을 통하여 전주의 경기전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알리고 싶었다. 태조는 새 왕조를 개창하여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어진을 여러 곳에 봉안하였고, 태종 역시 왕권 강화와 정통성 확립을 위하여 아버지 태조의 진전(眞殿)을 세우고 어진을 모셨다. 그 결과 수도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 각처 다섯 곳에 태조의 진전이 세워져 모두 여섯 곳의 진전이 운영되었다. 태조 진전 가운데 기록상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함경도 영흥부 흑석리에 소재하는 환조의 옛 집, 즉 태조가 출생한 곳에 세워진 준원전(濬源殿)이다. 같은 해 3월에는 태조의 어진을 계림부 곧 신라의 고도, 고려의 동경(東京)인 경주부의 집경전(集慶殿)에 봉안하였다.   태조 선조들의 고향인 전주에는 1410년(태종 10) 경기전을 창건하여 태조 어진을 모셨다. 이밖에 고구려의 고도이자 고려의 서경인 평양부에는 영숭전(永崇殿)을 세우고, 개성부 태조 옛 집터에는 목청전(穆淸殿)을 건립하였다. 이처럼 지방에 세워진 태조진전은 모두 태조와 인연이 깊고 삼국시대 이전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도읍이었던 곳이다. 이처럼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을 세움으로써 전주를 조선왕조의 본향으로 분명히 삼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에 왕의 존재, 그 자체였던 어진을 모심으로써 왕실의 고향임을 시각화하였던 것이다. 경기전은 전주에 제일 먼저 세워진 조선왕실 기념물로서 전주의 역사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원심력이었다. 전주에 부여된 여러 특성들, 예컨대 예향의 도시, 양반의 도시, 풍류, 음식의 도시, 그 모든 것은 ‘조선왕조의 본향’이라는 원천적 힘이 이 지역의 내적 조건과 어울려 전주를 상징하는 속성을 이룬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410년에 제작된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전주실록과 함께 묘향산 보현사까지 피난을 가는 등 위급한 상황을 넘긴다. 결국 임진·병자 양란 이후 영흥의 준원전본과 경기전본 태조 어진을 제외하고 다른 태조 어진이 모두 소실되며 태조 진전들 역시 파괴되었다. 이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경기전은 광해군 6년(1614)에 중건되어 묘향산에 피란 중인 태조 어진을 다시 모시게 되고, 1872년에는 어진을 새로 모사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태조 어진은 조선시대에 최고의 기술과 정성으로 소중하게 관리되었다. 이제는 좀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태조 어진과 경기전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경기전이 태조의 어진만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태조 진전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역대의 어진을 모신 서울의 선원전(璿源殿)과 달리 경기전은 조선왕조의 개창자 태조만을 위한 장소였던 것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하여야 경기전의 본뜻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경기전 월랑(月廊)에 역대 어진의 복원 사진을 전시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조선시대에 어진은 왕의 존재 그 자체였다. 따라서 어진의 관리는 왕을 모시듯이 엄격하게 하였다. 그런 점에서 태조 어진의 현대 모사본을 경기전 당가(唐家)의 문 밖에 걸어둔 것은 격식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이 점을 생각할 때 태조 어진의 원본을 어떻게 보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경기전의 건립 동기를 생각하면 봉안대상인 태조 어진을 원 봉안처에 보관하는 것이 순리이다. 하지만 경기전의 제반 조건이 태조 어진을 보관하기에 적합한 환경인가를 생각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조선시대부터 경기전의 여름 습기가 큰 문제였고 당대에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비책이 간구될 정도였다. 이제 태조 어진이 봉안대상으로서의 성격을 넘어서서 자손들에게 대대로 전승되어야 할 문화재로서의 의미가 더 커졌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는 섬세한 관리와 항온항습의 적정한 환경을 어떻게 유지시킬 것이냐를 두고 허심탄회하게 고민해야 한다. 태조 어진 뿐만 아니라 경기전 정전 및 월랑에 전시된, 각종 가마를 비롯한 의식구들은 서울의 국립고궁박물관에도 없는 매우 희귀한 문화재이다. 대기에 노출해서 전시하는 한 파손을 피할 길이 없다. 대비책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조선시대에 경기전은 조선왕조 창업자의 초상을 모신 곳으로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제 세월이 바뀌어 경기전은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공원이 되었다. 모든 이들이 선조들의 유산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한편 경기전이 예사로운 유원지가 아니라 왕의 초상을 모시는 엄숙한 공간이었다는 원칙은 존중될 필요가 있다. 역사가 이룬 이러한 품격을 현대의 가치와 양립시킬 수 있는 방도를 찾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과제이다. 앞으로 이 문화재들이 전주에서 어떻게 자리매김되는가는 이 시대의 역사인식과 문화역량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이수미 | 조선시대 회화사를 전공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서 학예연구관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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