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7 |
[익산]문화교류의 요충지
관리자(2005-07-06 13:53:20)
문화교류의 요충지
익산은 전라북도 서북단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충남 논산군, 부여군에, 서쪽으로는 옥구평야에, 남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평야에 접하고 있는데, 동부에 자리한 천호산과 미륵산, 서북부의 함라산 줄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지역이 광활한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북동부로는 서해로 통하는 관문인 금강이 인접하여 있고, 남부에는 만경강이 서해로 흐르고 있어서 농경이 경제활동의 주요수단이 되고 문물 수송이 주로 수로를 통하여 이루어지던 시절에는 문화 교류의 창구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지닌 지역이기도 하였다.
오늘날과 같이 육상교통(陸上交通)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수로교통(水路交通)은 짧은 시간 안에 대량의 물품을 수송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따라서 선사(先史)시대부터 이미 문화의 전파는 주로 강· 하천과 인접해 있는 수로교통의 요충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익산의 지리적 환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故) 김원룡박사는 익산을 경주· 평양과 더불어 청동기문화의 중요한 거점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익산의 용화산· 미륵산· 오금산· 용제동· 다송리· 평장리 등지에서 비파형 동검, 중국식 동검(도씨검) 등의 청동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유물들 중 요령식 동검이라고도 불리는 비파형동검은, 금강유역에서는 기원전 6세기경 이후에 출현하는 것으로써, 익산이 일찍부터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곳임을 알려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영등동의 장방형· 원형 주거지유적 및 구순각목문토기(口脣刻目文土器)· 석부· 방추차 등의 유물, 부송동의 원형 주거지 유적 및 석촉, 삼각형석도, 발형토기 등의 유물, 석천리 옹관묘 유적, 신동리 토광묘 유적 등 고고학 자료가 증가함에 따라, 이 지역 청동기문화의 존재가 더욱 더 입증되고 있다. 특히 세형동검과 함께 철사(鐵 )가 출토된 신동리 토광묘 유적은 기원전 2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익산과 관련하여 줄곧 언급되어 온 고조선의 준왕(準王) 남천(南遷)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준왕의 남천을 계기로 익산지역은 기존의 청동기 문화가 새롭게 변화하여 마한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한편 익산은 준왕의 남천지(南遷地)로서, 혹은 마한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인 목지국(目支國)으로 비정되는 지역으로써, 이는 위와 같은 문화적 기반과 이 지역에 전해지고 있는 마한 관련 설화 및 사서(史書) 속의 기록 등을 통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중국사서 『후한서』 동이전 한조(後漢書 東夷傳 韓條)에 실린 “조선왕(朝鮮王) 준(準)은 위만에 격파되자 무리 수 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을 공파(攻破)하고 자립하여 한왕(韓王)이라 하였다”는 기사에서 우리는 준왕이 남분(南奔)(기원전 198년)하여 정착한 곳에는 이미 마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가 남천한 곳이 과연 어디일지가 관심사 중의 하나이다.
비록 후대의 것이기는 하지만, 이승휴의 『제왕운기』나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준왕이 남천한 땅을 익산 금마군이라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익산에는 마한성(馬韓城)이라고도 불리는 낭산성(朗山城), 기준왕(箕準王)이 쌓았다는 미륵산성(彌勒山城), 준왕 부부의 묘라는 익산쌍릉, 준왕의 세 아들의 태(胎)를 묻었다는 태봉산 등 기준(箕準)· 마한 관련 설화가 깃든 유적이 많다. 이 자료들이 익산=목지국이었다는 직접적 단서가 될 수는 없겠지만, 마한시대 익산의 정치적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편 익산은 백제에 들어와서도 금강 하구와 만경강을 통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으며, 그 정치적· 문화적 위상이 더욱 더 커졌는데, 이는 오늘날 익산지역 도처에 남아 있는 다양한 문화유적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대표적인 백제의 문화유적으로는, 입점리와 웅포리 고분군, 연동리 석불좌상과 태봉사 삼존석불, 익산쌍릉, 미륵사지와 사자사지, 제석사지, 익산토성, 왕궁리 유적, 백제토기요지, 금마도토성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익산쌍릉· 미륵사지· 왕궁리유적· 제석사지· 사자사지 등은 백제 말기 무왕과 관련이 깊은 유적들로 주목받고 있다.
익산쌍릉은 그 조성 형식으로 보아 백제 말기 제30대 무왕 부부의 능이라 추정되고 있으며, 미륵사지는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를 가던 도중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자 못을 메우고 삼원가람을 조성하고 미륵사라 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전하고 있어서 그 조성의 배경과 의의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 특히 최근에는 동양최대 최고의 석탑인 미륵사지 서탑의 해체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더욱 더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왕궁리 유적의 경우, 현재는 오층석탑 1기만이 덩그마니 남아 있으나, 1989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5개년 단위로 연차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전체 약 12만 평방미터 중 2/3 정도가 발굴된 상태이다. 발굴조사에서 이 유적은 오층석탑과 관련이 있는 사찰유적이 들어서기 이전에, 동서
230m, 남북 450m의 장방형의 궁성 규모를 갖추고, 궁(宮)의 담장과 같은 형태의 성벽이 둘러쳐진 성곽이 확인되었으며, 성벽의 노출과정에서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에 해당되는 유물(주로 기와류)이 출토됨으로써, 백제 말 이후 궁성의 규모를 지닌 유적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조선후기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지리서인 『대동지지(大東志地)』에서 “(익산은) 본디 백제의 금마지(今麻只)인데, 무강왕 때에 성을 쌓고 별도(別都)를 두어 금마저(金馬渚)라고 불렀다.”고 하여 익산이 한때 백제의 별도였음을 전하고 있다. 한편 1970년대 초에는 일본 청련원(淸蓮院)에서 발견된 중국 육조시대의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서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하여 새로 정사(精舍=사찰)를 경영하였다.”는 기록이 새롭게 밝혀져 백제 무왕의 ‘지모밀지’ 즉 익산으로의 천도가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관세음응험기』에 실린 무왕의 익산천도설은 『삼국사기』등의 정사(正史)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익산지역이 갖추고 있는 지정학적 조건과 익산지역에 남아있는 관련 유적을 근거로 그 타당성을 주장하는 설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는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가 『관세음응험기』에 보이는 ‘제석정사(帝釋精舍)’의 사리장치와 흡사하다는 점과, 함께 들어있던 『금강경판』이 백제말기 작품이라는 연구가 나오면서 그 신빙성이 한층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은, 『관세음응험기』 내용 중의 ‘제석정사’가 왕궁리 유적 북편에 있는 절터 발굴조사 결과 백제 때 조성된 제석사라는 사찰과 동일하다고 밝혀짐에 따라서 이 문헌의 신빙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익산지역은 청동기시대 이래 고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전북지역의 문화적 중심지였으며, 그러한 문화적 역량은 백제시대, 그 중에서도 특히 제30대 무왕 대에 들어와서 그 위상과 중요성이 더욱 더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익산지역의 문화적, 정치적 위상이 밝혀지면서 지난 2004년 3월에는 <고도보존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경주· 부여· 공주와 함께 고도(古都)에 포함되었는데, 이는 대외적으로도 익산의 역사적 위상이 인정받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익산지역에는 이들 유적 이외에도 미륵산성, 낭산산성, 심곡사, 왕궁리 오층석탑, 문수사, 이병기선생생가, 고도리 석불입상, 숭림사 보광전, 연안이씨 종중문적, 화산천주교회, 망모당, 익산향교, 여산동헌, 함벽정, 소세양 신도비 등 셀 수 없이 많은 문화유적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김삼룡 |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중국문화대학과 일본 동경축파대, 러시아 모스크바대에서 수학했다. 현재, 원광대학교 마한·백제연구소 소장과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논저로 「미륵신앙의 근원과 역사적 전개」, 「익산문화권의 연구」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