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7 |
[녹차]숲속의 보물, 자생차나무 군락
관리자(2005-07-06 13:50:47)
숲속의 보물,
자생차나무 군락
새 벽
가람 이병기
돋는 새벽 빛에 窓살이 퍼러하다.
白花藤 香은 牀머리 떠돌고
꾀꼬리 울음은 잦아 여윈 잠도 잊었다.
松花 누른 가루 개울로 흘러오고
돌담 한모르에 시나대 새순 돋고
茶밭엔 다잎이 나니 다나 먹고 살을까.
1950년대 초, 가람 이병기 선생이 오목대 및 양사재에 기거하면서 지은 이 시조에는 당시 오목대의 정경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우리나라의 차문화는 급속도로 쇠락했어요. 하지만, 가람 선생님처럼 여전히 차맛을 알고 즐기던 분들이 계셨던 것이죠.” 현재 교동 한옥마을에서 전통찻집 다문을 운영하고 있는 박시도 씨는, 이 시조가 당시에도 차문화의 명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과 오래전부터 오목대에 자생차나무 군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자생차나무란, 말 그대로, 인간의 손길을 닿지 않고 오랜 시간 제 스스로 완전한 생태계에서 자란 차나무를 말한다. 오목대 뿐만 아니라, 우리지역 곳곳에 이런 자생차나무 군락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곳이 부안의 반계유형원 사적지가 있는 우동리, 고창의 선운사, 정읍의 내장사와 백양사, 순창 구림면 안정리, 익산 웅포 임해사지, 임실 회문산 만일사 등이다. 전주나 정읍 등에는 시내의 야산에도 차나무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절터와 관련된 곳이 많다. 고려시대에는 차가 일상적인 기호음료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순창군 적성면 석산리 강경마을의 자생차나무군락은 그 규모에서 어떤 곳에도 뒤지지 않는 곳이다. 온통 돌산으로 둘러싸인 강경마을은 섬진강 상류의 한 가지가 지나는 곳이다. 차나무는 특성상 고온다습한 기후조건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자생차나무군락은 주로 섬진강 줄기를 따라 분포해 있다. 마을 앞 개천이 뿜어내는 안개와 돌산의 복사열은 이곳을 차나무가 생장하는데 최적의 조건으로 만들어 준다고 한다.
강경마을에서 계단식 논길과 산길을 따라 걷기를 10여분, 빽빽하던 숲이 갑자기 환해진다.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있는 활엽수들 밑은 온통 푸른 잎들 천지다. 자생차나무군락이다. 이랑을 이루며 길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재배녹차밭’과는 그 생김새부터가 사뭇 다르다. 건강함이 살아 있는 숲에, 차나무 또한 숲을 이루는 한 종류의 나무로 자리를 잡고 있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만 해도 대나무, 밤나무, 참나무, 고로쇠, 때죽나무, 소나무 등 다양하다.
“완전한 생태계에서 오랜 시간 자생한 차나무군락은 드뭅니다. 직근성 식물이라 깊이 뿌리를 내리는 차나무는 깊이 있는 영양분을 끌어올려 다른 나무들의 성장을 돕고, 차나무의 도움을 받은 활엽수들은 다시 낙엽으로 차나무의 생장을 돕습니다. 이곳의 모든 나무들이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각각 제 기능을 하면서,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죠. 차나무 또한 이곳에선 하나의 톱니바퀴 기능을 하는 것이구요.” 이곳 자생차나무군락을 발견한 박시도 씨의 설명이다.
하지만 차나무를 모르는 일반인들에겐 단지 관목 숲에 불과했을 터. 오래전부터 이곳을 알고 있던 마을사람들은 이 귀중한 차나무들을 ‘개동백’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차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기 시작한 곳엔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옛 사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느 시대의 절이었는지 절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곳이 자생차나무군락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점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사찰에서 가꾸던 차나무가 스스로 씨앗을 퍼트리고 자라나 이제는 대규모의 자생차나무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몇 백 년 전, 인간의 손에 의해 재배되기 시작해 이제는 제 스스로 건강한 숲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자생차나무. 한적한 산길을 걷다가 푸른 잎 가득한 관목 숲을 발견하게 된다면, 혹 자생차나무가 아닐까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