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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6 |
물, 삭힘과 포용의 근원-꽃게무덤
관리자(2005-06-13 16:46:37)
물, 삭힘과 포용의 근원 『꽃게 무덤』 (권지예 지음, 문학동네 펴냄) 『꽃게 무덤』은 2002년 단편 「뱀장어 스튜」로 26회 이상문학상을 받은 권지예의 세 번째 소설집이다. 『꽃게 무덤』에는 표제작을 포함하여 「뱀장어 스튜」등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첫 소설집 『꿈꾸는 마리오네뜨』(2002년)에서는 프랑스에 체류한 30대 이방인 여성의 정체성이, 『폭소』(2003년)부터는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인 갈등이 구현되었던 것과 달리 『꽃게 무덤』(2005년)에는 음식의 상징, 여성의 정체성, 죽음에 대한 응시 등, 인간 존재의 양태를 탐구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들이 전개되어 있다.   표제작 「꽃게 무덤」은 기이할 정도로 간장게장을 탐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던 한 남자, ‘그’의 이야기이다. 꽃게 무덤처럼 빈 자리만 남겨둔 채 사라진 여자의 자취를 더듬으며 석모도 갯벌을 찾지만, ‘그’는 그곳에서 간장게장의 냄새와 그녀에게 중독된 자신의 모습만 발견할 뿐이다. 「뱀장어 스튜」는 피카소가 마지막 연인 자클린이 요리하는 모습을 그린 <뱀장어 스튜>를 통해 ‘그녀’가 뱀장어 같은 자신의 격정을 조용히 고아낸 과정이 세 개의 시선으로 형상화한다. 「꽃게 무덤」과 「뱀장어 스튜」은 이처럼 간장게장과 뱀장어 요리로써 사랑의 질감을 구체화한다. 「우렁각시는 어디로 갔나」와 「여자의 몸-Before & After」는 출세한 남편에게 버림받은 한 여자의 헌신적인 아내상과 뚱뚱한 여자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날씬함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자매애의 건강한 여성성을 제시한다. 「비밀」과 「산장카페 설국 1㎞」에서 죽음은 마술과 폭우가 지닌 공통점인 ‘사라짐’으로 환치되어, 전자에서는 유괴범에게 매장당할 순간에 놓인 아이가 자신의 사라짐을 마술처럼 밝혀내지 않으면 알 수 없음을 고백하였고, 후자에서는 1년 전 폭우로 남편을 잃은 ‘수옥’이 금년 장마 끝에 사라진 카페 설국 사람들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용서의 참의미를 인식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와 「봉인」은 출간된 자전적 소설 때문에 허구와 실재를 구별 못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당한 고충과 의사의 오진으로 죽음을 선고 받고 심적 고통에 함몰되었던 체험을 서술한 자전적 성향이 강한 작품들이다. 끝으로 「물의 연인」은 사십여 년 동안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열흘도 채 같이 있지 못한 두 노년의 완숙한 사랑을 물의 이미지를 통해 잔잔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사랑의 깊이를 그랜드 캐년의 협곡과 콜로라도 강과 수몰지구 저수지의 물로 구체화한 「물의 연인」은 사랑의 질감과 여성의 정체성과 죽음의 응시 등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어 『꽃게 무덤』의 주제를 집약한 듯한 강한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판단이 가능한 것은 「물의 연인」에는 「꽃게 무덤」, 「뱀장어 스튜」, 「산장카페 설국 1㎞」 등에서처럼 불을 압도하는 물, 충만한 여성성과 죽음의 욕망을 동시에 뜻하는 물의 이미지가 풍부하게 변주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의 연인」에 등장하는 ‘그’는 갓 결혼한 아내와 여름휴가를 갔을 때 남한강에서 아내의 외사촌 여동생을 만난다. 40여 년 전 바로 그날 현기증이 일 정도로 강한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힌 ‘그’는 2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에게 함께 죽고 싶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고 아내가 죽은 지 3년 뒤, 13년 만에 다시 그녀를 만난다. 그리고 6년 후에 재회하여 네바다 주의 한 인디언 마을에서 ‘그’는 ‘타오르는 불꽃’을, 그녀는 ‘깊어가는 강물’이라는 인디언 이름을 얻게 된다. 서로 화합될 수 없는 듯한 ‘타오르는 불꽃’과 ‘깊어가는 강물’의 인디언 이름은 사실상, 부부 인연의 끈을 잡을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불은 타오르려는 속성으로 위로 솟구치려 하고 물은 끝없이 가라앉으려 하니, 영원히 만날 수가 없다”(260쪽)는 화수미제(火水未濟)를 사라지게 할 방법은 서로가 물이 되는 도리밖에 없다. 인디언 이름을 얻는 지 4년 만에 딸의 약혼식 참석차 한국에 들어온 그녀는 3년 뒤, 편지 같은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그녀의 딸 미라가 건네 준 유분을 품에 안은 채 “저는 이제 당신에게로 돌아가려고 해요. 당신에게 흘러가고 싶어요. 만약 제가 죽게 되면 제 몸을 태워 당신의 그 호수에 흐르게 해주세요.”(267쪽)라고 적힌 편지를 읽으면서 자살을 결심한다. 물의 정령이 된 그녀와 끊임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으려면 ‘그’가 그녀의 호수에 사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줌의 재로 변한 ‘깊어가는 강물’의 그녀를 가슴에 품은 채 ‘타오르는 불꽃’의 ‘그’는 콜로라도 강에 투신한다. 콜로라도 강이 수백만 년이 흐르는 사이 그랜드 캐년의 깊은 협곡을 탄생시켰듯이 두 사람을 물의 연인으로 영원히 감싸 안을 것이다. 「물의 연인」은 40여 년의 세월에 삭혀진 두 노년의 사랑 이야기로, 성숙한 사랑이란 마치 물처럼 삭힘과 포용을 담고 있음을 형상화하였다. 물의 이 같은 이미지는 「물의 연인」에 앞서 발표된 「뱀장어 스튜」와 「꽃게 무덤」에서도 변용되어 나타나 있다. 「뱀장어 스튜」에 등장하는 ‘그녀’는 피카소가 마지막 연인 자클린에게 바친 <뱀장어 스튜>를 보고 노화가의 열정적 화염이 종국에는 뱀장어 스튜를 데울 만큼 은근하고 고요하게 잦아든 것을 느끼며, 인생이란 뱀장어의 몸부림과 같은 격정을 조용히 끓여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혼하기 전부터 자살 시도와 낙태로 오른손목과 아랫배에 흉터가 있는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상흔들을 애무하며 어루만져 주는 남편에게 권태를 느낀다. 황홀한 사랑을 기대하며 첫사랑의 남자와 하루를 보내지만 결국 ‘그녀’는 그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루하루 끊임없는 애증으로 엮어진 질긴 실의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남편은 그런 그녀를 위해 삼계탕을 끓이면서 생각에 잠긴다. “살아서 펄떡이는 것들을 모두 스튜 냄비에 안치고 서서히 고아내는 일. 살의나 열정보다는 평화로움에 길들여지는 일. 그건 바로 용서하는 일인지 모른다.”(70쪽)며 사랑이란 모든 것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용서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모든 재료를 삭히고 포용하는 물처럼 서로에게 인내와 용서를 발휘하지 않으면 깊은 맛의 사랑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성숙한 사랑은 불같은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삭히며 상대방을 끊임없이 이해하려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자신을 삭히며 타인을 포용하지 않는, 다시 말하면 딱딱한 자신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인간에게 성숙한 사랑을 기대하기 어렵다. 「꽃게 무덤」은 바로 이러한 작품에 해당된다.   「꽃게 무덤」은 간장게장이 그 소재이다. 애인을 잃고 바다에 투신하려던 그녀를 살린 ‘그’는 간장게장을 탐하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한밤중에 일어나 온 존재를 집중시켜 쪽쪽 소리를 내며 게 다리를 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면 ‘그’는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든다. 결국 살을 발라 먹고 텅 빈 껍데기로 남은 게처럼 그녀는 꽃게 무덤 같은 옷을 남겨둔 채 그렇게 ‘그’를 떠나간다. “꽃게는 외부와 소통이 잘 안되는 고립되고 자폐적인 인간형을 상징하지요. 게살을 탐하고 텅 빈 껍데기로 남는 꽃게를 통해 삶과 사랑의 비극성을 드러내고자 했어요.”(국민일보, 2005.4.29.)라는 작가 권지예의 발언은 꽃게가 지닌 특성은 물론 「꽃게 무덤」의 주제를 시사하고 있다.   『꽃게 무덤』은 전체적으로 보면, 삭힘과 포용의 근원인 물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최근작 「물의 연인」에 물의 이미지가 풍부하게 변주되어 형상화된 것은 이 같은 사정을 나타낸다. 흐르는 물을 세월의 삭힘과 성숙한 사랑으로 함축하면서 재탄생의 원천임을 의미화 했다는 점에서 「물의 연인」은 주목된다. 하지만 「물의 연인」 또한 여덟 편의 다른 작품들과 더불어 『꽃게 무덤』에 푹 담긴 채 약한 불에서 천천히 고아지지 않으면 참맛의 성숙한 해석은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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