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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5 | [문화비평]
'역사의 계절'에 숨고르기
이종민(2003-04-07 15:06:23)
때아니게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평소 주식투자나 자녀교육 등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만 매몰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맹렬한 민족사관 주창자로 나섰다. 통일이나 남북문제에조차 모르쇠로 일관하던 사람들마저 들고일어나 '역사 바로 세우기'를 외치고 있다. 바다 건너에서 불어오는 황국사관에 의한 역사왜곡의 매서운 황사바람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영삼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 괴이한 말을 탄생케 했던 무능한 전직 대통령이 외치던 구호와 이들의 주장이 비슷해서 만은 아닐 것이다. 봄날 들불처럼 너무 쉽게 타올라 삽시간에 번지는 예의 '냄비 속성' 때문일 수 있다. 자기 반성을 곁들이지 못하는 호들갑도 마뜩찮아 하게 하는 데 한몫 거들고 있다. 과거 식민지 시절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가장 반역사적인 영역에서 더 요란하게 왕왕거리는 모습은 이런 식의 냉소 분위기를 더욱 부추긴다. 발빠른 시위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아보려는 정치꾼들의 얄팍한 처세는 차라리 슬프기조차 하다. 황국신민 됨을 황송해하던 족벌언론이 앞다투어 설치고 나서는 꼴도 밉상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황국의 장교출신 독재자를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치켜세우며 그 기념관을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역사왜곡을 들먹이고 있으니 그 잘난 일본인들이 코방귀를 뀌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거기에 거액의 국가예산을 들이겠다는 정부에서 대사를 소환한다 한들 그들이 거들떠보기나 하겠는가? 일본교과서의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이 정당하다거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을 비판하려면 우리부터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 당당해져야 그 비판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으며 그것에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다. 왜 우리의 시끌벅적한 외침에는 아랑곳하지 않던 저들이 중국의 항의에는 움찔 놀라는가를 반성하며 항의를 해도 해야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친일부역을 한 사람들이 반성문 하나 없이 이 사회의 유지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한, 한일합방을 미화하고 태평양전쟁을 성전이라 치켜세워도 정작 우리는 할 말이 없다. 황군장교출신을 근대화의 기수로 떠받들고 있는 이상, 식민통치가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는 저들의 말 같지 않은 논리도 공박할 수가 없다. 식민지의 젊은이들을 '황국성전'의 총알받이로 내몰았으며 친일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향유했던 세력에 아첨하던 언론이 민족정론지요 민주화의 기수임을 자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과서에 그렇게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 는 한, 또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공연한 흠집내기로 매도하는 분위기가 식자들 사이에서조차 만연해 있는 한 저들의 코웃음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식민통치의 여파로 인한 남북분단과 이념적 극한 대립 및 민족상잔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미 과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 된 냉전 논리가 사그라질 줄 모르는 맹목으로 이 땅을 뒤덮고 있다. 그 황당한 매카시즘이 이 대명천지에도 공당과 거대 언론의 푯대로 펄펄 살기를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얼마나 심각한 폐해의 어두운 그림자를 우리 현대사에 드리웠는가에 대하여 차분하게 반성하는 분위기 조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근대 민족민주운동의 시발점인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평가와 기념에서도 청산하지 못한 식민통치의 끈질기고 역한 입김은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가장 큰 규모의 항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농민군과 그 지도자의 신원(伸寃)은 이루지지 않고 있다. 국가유공자로의 지정은커녕 명예도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기념하는 꼴은 더욱 가관이다.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내세운 전 민족적 항쟁이요 동아시아 국제 질서 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이 역사적 사건을 고을 한 구석에서 일어난 조그만 봉기 정도로 기념하려는 지역이기주의에 의한 역사왜곡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를 볼모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꿈꾸는 불순한 정치세력에 의한 전유(專有)의 야욕이 기념사업 곳곳을 분탕질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농민혁명 유적지는 방치한 채 황군 장교출신과 그의 자랑스런 후배가 조성한 기념관 주변에 또 다시 엄청난 국가예산을 투입하겠다는 몰역사적, 비경제적 발상은 분노를 넘어 절망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이처럼 역사왜곡은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의 교과서마저 뻔한 사실을 잘못 기록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남의 나라 교과서만 탓하고 있어서야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 또한 강경 일변도의 대응도 실현가능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아니 실현가능성이 없으니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래야 계속 떠들어대며 자신의 애국심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과거의 구린 구석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호도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라도 이러한 호들갑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온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보다 냉철하고 현실성 있는 대응에 힘을 실어야 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재수정 요구를 감정적으로 제기할 것이 아니라 교과서 불채택운동 등을 차분하게 그리고 끈기 있게 해나가자는 것이다. 되지도 않을 일에 헛다리품 팔다가 품팔기 자체에 만족해하거나 카타르시스로 자위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일에 힘을 쏟자는 말이다. 진정한 '역사 바로 세우기'는 한바탕의 푸닥거리로 이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이용해보겠다는 애먼 욕심이 개입하면 될 일도 그르치게 마련이다. 우리들 자신의 식민잔재를 털어 내지 못하는 한 모두 공염불로 끝날 수밖에 없다. 열뜬 '역사의 계절'에 숨고르기를 어렵게 제안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처럼 조성된 역사에 대한 관심이 거듭되는 좌절로 인해 역사허무주의나 무관심의 나락으로 이어지는 일만은 피해야 하겠기에 말이다. 정치공세적 '냄비대응'을 염려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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