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6 |
제 99회 백제기행-충남논산
관리자(2005-06-13 16:45:35)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은 이곳 논산 파평윤씨와 광산김씨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곳 논산은 이 두 가문을 비교해 가며 둘러 보면 훨씬 흥미롭다. 파평윤씨 가문에서 선산을 가꾸는 것을 중히 여겼다면 광산김씨 가문은 제사를 중시 여겼다.
윤증 고택 전주에서 오전 8시30분에 출발하여 논산~천안간 고속도로를 달렸다.
공주로 가는 23번국도의 노성읍을 지나자마자 좌측에 교촌리가 있는데, 이 마을길로 350m 정도 들어가면 윤증고택이 나온다.
윤증 고택은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노성산의 남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윤증 말년인 18세기 초에 현재의 집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고택의 서쪽에 인접하여 '노성향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 능선 넘어에는 공자의 영당인 '노성궐리사'가 자리잡고 있다. 고택 앞 남쪽 작은 언덕이 안산을 이루며, 안산에는 인공으로 조성된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외부로부터 집 전체가 노출되는 것을 살짝 가려주고 있다.
종학당은 조선 인조21년(1643) 윤순거가 문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건립했다. 종약을 제정하여 종중의 자녀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이 모아 합숙교육을 시키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대과에 합격한 사람은 무려 40여명에 이른다 한다.
멀리 이곳에서 바라보면 맞은편에 파평윤씨 선산이 보인다. 묘지 옆 문관석들이 쓴 모자로 시대를 구분할 수 있다 한다.
점심은 윤증고택을 들어가는 입구 금수강산이라는 식당에서 동태매운탕을 맛있게 먹고 돈암서원으로 향하였다.
(마당에 주차가능. 전화 041-736-6040)
돈암서원은 본래 조선 인조 12년(1634) 이곳에서 1.5km 떨어진 숲말에 세워졌었다.
현종원년(1660)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지대가 낮아 홍수때 물이 뜰까지 넘쳐들어오므로, 고종 17년(1880) 현재의 자리인 임리 74번지(서원말)로 옮겨 지었다. 고종 3년(1866) 서원철폐령에서도 제외된 서원이었다.
마당 가운데에 돈암서원비문이 있는데 동춘당 송준길이 글을 짓고 우암 송시열이 글씨를 쓴 기록이 보였다. 비문에 의하면 방, 대청, 툇마루, 행랑을 갖춘 응도당이 있었고, 응도당의 왼쪽에 거경제 오른쪽에 정의재가 있었으나 현재로서는 그 건물이 어느 것인지를 분간하기도 어렵고 원형대로 보존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김장생을 주향으로 하여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 제자인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선생등 문묘에 배향된 네 분만 모시고 있는 보기 드문 서원이다.
개태사 - 고려와 운명을 같이한 고찰
'만세태평의 시대를 연다'는 뜻의 개태사(開太寺)는 왕건이 후백제를 무너뜨린 기념으로 4년간에 걸쳐 지은 고려의 왕립사찰이다. 왕건이 죽은 후 개태사에는 왕건의 영정을 모시고 기일마다 제사를 지냈고, 그의 옷 한 벌과 옥대도 보관하였다. 또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신탁을 받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번성하였다. 이런 영광을 한 몸에 누린 개태사지만 고려 말기 잦은 왜구의 침입에 의해 방화와 약탈을 당하면서 폐사가 되었다. 석조 본존불(보물 219호)은 끊어진 채 도랑에 묻히고 협시보살상도 목이 떨어진 채 땅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 1930대 중반 5층석탑과 매몰되었던 석불을 찾아 절을 세우고 도광사라 하였다가 이후 개태사란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개태사에서 눈길을 가장 끄는 철솥(충청남도지정 민속자료 1호)은 개태사 주방에서 국을 끓일 때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직경 3m, 높이 1m, 두께 3cm에 이르니 승려가 3000명이었다는 개태사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돌아오는 길에 계백장군전적지와 미내다리를 둘러보니 하루해가 어느덧 넘어가고 있었다.
진행 | 마당 기획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