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6 |
제 99회 백제기행-충남논산
관리자(2005-06-13 16:44:39)
파평윤씨와 광산김씨가 조우하던 날
| 강옥자 화가
여행! 두 글자만 보아도 마음이 설레인다.
빨강. 노랑. 파랑에 온갖 색색의 물감까지 흩뿌려놓은 파스텔 세상의 봄철 여행은 굳이 말이 필요 없는 환상, 그 자체가 아닐까? 발길 닿는 곳이, 잠시 머무는 곳이 바로 그림이 될터이니. 여행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그림을 그리다보니 좋아서도 필요에 의해서도 잦은 여행길에 오른다.
연분홍빛 산벚꽃들이 흐드러지게 온산을 채색하던 4월 하고도 17일 날. 작은 스케치북 한권과 연필 한 자루가 나와 함께 이번 여행길에 동행을 했다.
99번째 맞는 백제기행을 따라 우리 고장 백제 숨결을 느껴보고자 파평 윤씨와, 광산 김씨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 예학의 고장 ‘논산’을 찾았다. 이 날의 여행 안내자 이흥재 사진작가의 역사 속 백제를 들으며 발로하는 여행, 손으로 하는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자, 저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가 보실까요?
맨 처음 발길 머문 곳 ‘윤증 고택.’
먼저 윤증이란 인물에 대해 알아보자. 1629년 태어났으며 자는 자인, 호는 명재, 문성공의 시호를 받은 학자로, 현종 때 천거되어 지평, 진선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그 후로도 우참찬, 좌찬성, 우의정, 판돈영부사 등 교지마저 받들지 않아 ‘백의정승’이라 불리게 된다.
한때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예론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을 날렸으나, 아버지 묘갈명 청탁에 대한 송시열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절교하고 만다. 그 뒤 남인에 대한 처벌에 있어 집권층인 서인이 강온 양파로 갈라지자, 그는 온건을 주장하는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강경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치열한 당쟁을 벌인다. 이때부터 명재는 이곳 ‘논산’에 머무르면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숙종 40년 1714년 세상을 떠난다.
노성면 교촌리에 위치한 윤증 고택은 조선 효종 때 지어진 전통적인 기와집. ㅁ자 평면의 안채, 동남 모퉁이에 一자로 지은 사랑채가 붙어 있는데, 사랑채에는 내루가 높다랗게 꾸며있어 전원의 경관과 주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길 왼쪽 바깥마당에 큰 연못이 있고 주변에 배롱나무와 벚나무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준다. 연못가에 피어있던 벚꽃 두 송이 스케치.
고택 바로 옆에는 300년 전 이전했다는 ‘노성향교’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노성향교에서는 5성(공자, 증자, 맹자, 안자, 자사)과, 송나라 2현(정이, 주희), 우리나라 18현. 모두 5성 20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 1년에 2번 제향을 올린다.
고택 앞에 ‘정녀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윤증 어머니께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혔을 당시 자결함으로써 정절을 지킨 뜻을 기려 나라에서 내리신 열녀의 표상이다.
이곳 윤증고택에서 나지막한 구릉을 넘어가면 ‘궐리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공자가 자란마을 ‘궐리촌’에서 유래한 곳이다.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으로는 강릉, 제천, 화성에 있었으나, 현재는 화성과 노성 두 곳에만 있다. 입구에는 하마비가 세워져있고,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세운 화표도 있다. 궐리사에는 중국에서 조각되어 이곳으로 옮겨진 공자의 석상도 있다.
이젠 ‘종학당’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윤증의 큰아버지인 윤소거가 파평윤씨 종중과 문중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1923(인조21)에 건립, 대과에만 42명이란 숫자가 배출되기도 했다. 이 종학당에서 마주보이는 곳에 파평 윤씨의 선산과 제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선산에 있는 망주석과 문인석은 조선중기의 석상으로 부처의 모습을 한 선비처럼 평화로운 모습이 상당히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파평 윤씨 가문의 답사를 끝내고 연산향교로 향했다. 향교 입구에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고, 내삼문, 외삼문이 있으며, 동서 양재, 명륜당, 대성전이 있다.
오전 일정동안 따가운 봄볕에 지쳐있던 일행들이 금수강산 가든에서 동태매운탕으로 꿀맛 같은 점심시간에 빠져있는 동안, 눈에 들어오는 빠알간 동백, 아니 춘백꽃 한송이.
이젠 쉴만큼 쉬었으니 ‘광산 김씨’ 문중으로 발길을 옮겨볼까나.
‘돈암서원.’ 사계 김장생이 타계한지 3년 후인 인조12년(1634년) 창건. 김장생을 주향으로 효종9년(1658) 신독재, 김집을 추배하고 숙종14년(1688)에 동춘당 송준길, 숙종21년(1695)에는 우암 송시열을 추배하였다. 안동의 도산서원, 장성 필암서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서원중 하나로 고종8년(1871) 전국적 서원 훼철령에서도 보존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돈암서원 응도당 앞마당에 피어있는 목련 두 송이 스케치. 밖으로 발길 돌려 나와 보니 유채 한그루 오롯이 앉아있네.
이번엔 ‘천호산 개태사’라는 사찰로 자리를 옮겼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운 후 18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936년 삼국을 통일한 후 개태사를 짓기 시작하여 4년이 지난 후 완공하게 되는데, 천여 명의 승려가 상주, 화엄법회를 갖는 등 승려양성도량 역할을 담당하였고, 8만 9암자를 소속시켰으며, 국가의 변고가 있을 때마다 중신들이 호국기도를 드리던 고려 최대의 호국수호사찰이었다.
개태사 경내에는 미륵삼존불상과 5층 석탑, 개태사 철확이 있다. 이 철확은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창건당시 주방에서 사용했던, 테두리가 없는 벙거지형 모자를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으로, 『여지도서』 충청도 연산군조에 의하면 개태사 전성기에 된장을 끓이던 솥이었다고 전해진다. 이곳 돌틈 사이에 피어있던 보랏빛 제비꽃 너무 앙증맞고 예뻤다.
다음 행선지는 ‘계백장군 전적지.’
백제의 장군 계백. 의자왕대에 성충, 흥수와 더불어 백제 3충신의 한사람으로, 백제 역사에서 충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라와의 네 번 싸움에 이겼으나, 화랑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마지막 총공격에 결국 백제군은 패하게 되고 계백장군은 장렬히 전사하여 이곳에 잠들어 있다. 들꽃 한 송이 바치고 경건한 마음으로 잠시 묵념.
오늘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 ‘미내다리.’
미내다리는 강경의 대표적인 역사 유적으로 3개의 홍예(아치)로 된 다리이다. 중앙 부분이 제일 높고 크며, 양쪽 홍예는 조금 작고 낮다. 중앙 홍예 정상부 종석은 다리난간 밖으로 돌출시켜 호랑이 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북쪽 다리난간 돌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강경 미내다리를 보고 왔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하고, 정월대보름날 자기 나이만큼 다리 위를 왕래하면 그해 액운이 소멸된다 하며, 추석날 이 다리를 일곱 번 왕래하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이 있다.
공주-천안간 민자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서울 오갈 때마다 지나치던 이곳에 이토록 정겨운 우리네 조상님의 얼이, 숨결이 숨쉬고 있었다는 걸 새삼 느끼고, 뿌듯한 마음을 안고 돌아온 하루였다. 많은걸 전해주신 강사님의 이야기들을 지면이라는 한계성 때문에 이글을 읽는 모든 분께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점 아쉬움으로 남는다. 만일 기회가 닿으면 독자 여러분께서도 여기 소개해드린 여행지를 한번 돌아보시기 바란다.
아휴, 머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지만, 공부 한 번 잘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