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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6 |
풍남문이 풍년을 기원하는 문이라고요?
관리자(2005-06-13 16:41:19)
풍남문이 풍년을 기원하는 문이라고요? |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몇해 전으로 기억하는 데, 전주라는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얘기하는 그런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전주, 전라도라는 곳이 농업의 중심지 아니었느냐. 그래서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풍남문이라고 한 것은 아닐까? 우문이라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늘 전주 속에서만 살아온 사람으로서 아!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라고 자문해 본 적이 있습니다. 풍남문의 ‘풍(豊)’가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글자이고 보니 전주가 어떤 도시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꼭 외지 사람들만 그런 생각을 할까? 왜 전주에는 남문의 이름이 풍남문이고, 객사의 현판이 풍패지관일까? 사실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게 그리 중요한 문제라 생각하지 않을런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서울 남대문을 숭례문으로 복권한 이유처럼, 전주 남문이 ‘풍남문’이어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풍남문은 전주부성(全州府城)의 남문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풍남문의 건립은 전주부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요. 그런데 불행히도 전주부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고려 중기 때 이후로는 성(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려중기 이후 세워진 전주성은 조선시대에 한 차례 확장된 것 같습니다. 1454년에 만들어진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주성의 둘레는 1,280보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성둘레가 5,356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조대 편찬된 『문헌비고』에는 2,618보, 『여지도서』에는 5,356척으로 적혀있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전주성은 1450년대에서 1530년대 사이에 2배 가까이 확장되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풍남문이 현 자리에 위치한 것은 대략 5백년 쯤 되었겠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풍남문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주성의 남문을 세운 것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전라도 관찰사 조현명이 아치형의 무지개 문으로 3층의 문루를 세워 ‘명견루(明見樓)’라 했다는 1734년의 일입니다. 조현명은 5월에 성황사에 제사를 지내고 옛 성을 철거하였으며, 2월 3월에 황방산과 흑석골에서 돌과 나무를 운반해와 그해 7월 8월에 남문을 세우고 ‘명견루’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합니다. 공사기간으로 보면 불과 7~8개월 만에 돌을 쌓고 건물을 지은 셈입니다. 이는 새로이 쌓았다기보다는 옛 성문의 자리에 있던 옛 성벽돌과 날라 온 새로운 성벽돌·자재를 이용하여 대대적인 개축을 했다고 여겨집니다. 명견루는 영조처럼 현명한 판단으로 백성들의 삶을 잘 보살피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주성 수축 당시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 조정에서 논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었는데, 영조의 특명으로 재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조현명는 남문은 물론이고 서문, 동문, 북문을 모두 새로 세우게 되는데, 각기 ‘상서문(相西門)’ ‘판동문(判東門)’ ‘중거문(中車門)’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조현명 이전의 전주부성 성문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기록으로는 이 때 처음으로 성문들이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상서문은 조현명의 직위인 재상의 ‘상(相)’자를 땄다고 하며, 판동문은 당시 판관(判官) 이었던 구성필이 신축을 담당했기 때문이고, 북문은 중군(中軍) 최덕이 맡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4대문의 이름을 짓는데, 성문의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영조의 시혜를 기리는 의미로, 서문은 관찰사, 동문은 판관, 북문은 중군의 글자를 차용했으니, 어찌 보면 자화자찬같기도 합니다. 그러다 1767년 전주 성내를 휩쓴 대 화재로 인하여 4대 성문은 물론이거니와 민가 1천여호가 불에 타버리는 최대의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서 성문공사가 다시 재개된 것은 그해 9월 관찰사 홍낙인 때였습니다. 홍낙인은 3층이었던 명견루를 2층으로, 2층이던 서문을 단층으로 복구하고 ‘풍패지향’에서 한 자씩을 따서 ‘풍남문’ ‘패서문’이라 하였습니다. 동문과 북문은 1775년 관찰사 서호수가 지은 것으로 완산주의 동쪽문이라 해서 ‘완동문(完東門)’이라 했고, 북문은 북쪽에 있는 임금을 언제나 받든다는 의미로 ‘공북문(拱北門)’이라 하였다. 이처럼 ‘풍남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지는 딱 238년이 된 셈입니다. 풍남문이 왜 풍남문인지를 알면, 적어도 전주라는 도시, 전주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카드를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고장이 농도(農道)이기 때문에 풍년을 기원하고자 붙여진 것이 아니라, 중국의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패현(沛縣) 풍읍(豊邑)’에서 유래한 ‘풍패지향(豊沛之鄕, 제왕의 고향)’이 곧 전주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풍남문은 객사와 함께 전주의 역사와 굴곡을 함께  해 온 몇 안되는 문화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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