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6 |
‘애성 받치다’와 ‘숭불퉁 앓다’
관리자(2005-06-13 16:33:17)
‘애성 받치다’와 ‘숭불퉁 앓다’
만석이는 겨우내 투전판에 나락 마흔 섬 날려 먹고 속이 시커멓게 타, 그 속 식히느라 새벽마다 고샅길 개똥을 줍고 다녔답니다. 날마다 주운 그 개똥 속에 미나리 싹도 묻어 있었답니다.
종태가 다시는 투전판에 안 나가겠다고 손가락 두 개나 잘라내고도 다시 끗발 조이러 나간 속사정이, 천 생원네 머슴 놈하고 엉겁결에 만난 뒤 다시는 안 만난다고 수없이 이를 악물었으나 지랄 같은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종태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천석꾼이 장손, 남철이 아저씨는 새각시 따라 소리패로 한 세상 떠돌다가 결국 아편쟁이 홀애비 되어 수없는 손가락질을 당하고 자기 집 상머슴 살던 배 생원 환갑잔치에 쌀 두 되어치 소리 한 후로 할아버지 묘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정 때 왕 소나무에 목매달고 죽은 최 면장네 머슴과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머리채 잘리고 푸닥거리로도 못 풀어낸 살 탓으로 결국 쇠꼬챙이처럼 말라비틀어진 영이 누나는 철모르는 애들 놀잇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액상한’ 이야기들이 무슨 아름다운 과거라고 들추느냐 되물을지 모르지만 사실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속내 또한 알고 보면 어슷비슷합니다. 그리고 알고도 모른 척, 모르고도 아는 척, 우리는 또 그렇게 나이와 더불어 살아가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깊은 산 속 옹달샘이 맑고 깨끗할망정 발 한 번 담그면 흙탕물이 될 수밖에 없는 법이고, 빗물, 냇물, 썩은 물, 흙탕물, 눈물, 콧물까지 모두모두 모여도 여전히 같은 깊이와 빛깔로 사는 바다처럼 그렇게 나이 들고 싶지요.
세월이 그대를 속였든 그대가 세월을 속였든 살다보면 말로 못 할 일들이 생기고 그때마다 속이 끓다 못해 시커멓게 타 버리고 타다 못해 녹아 문드러지는 일들이 사람마다 있을 터이고 또 사람들 마다마다의 속내를 모아놓고 보면 차라리 웃어 버리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긴 표현들이 오늘의 이야깃감입니다. 나는 한자에 눈을 뜨고 왜 하필 ‘환장(換腸)하다’는 말이 생겼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애’가 창자나 간이라는 것(腸 애 <『천자』-칠26>, 肝 애 간<『유합』-칠13>)을 알고 나서 ‘애’에 관련된 그 많은 동사들이 모두 지독하게 슬픈 것들을 보고 놀라고 또 놀랐습니다.
‘애’와 연결되는 단어들로는 ‘타다, 닳다, 태우다, 쓰다, 끓다’가 표준어법에 맞는 표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 동네에서는 ‘애성 받치다’라는 말이 쓰이는데 이 말 또한 표준어 ‘애성이’와 비슷한 말입니다. ‘애성이’는 ‘속이 상하거나 성이 나서 몹시 안달하고 애가 탐. 또는 그런 감정’을 뜻하며 “싫다는데 지지리 못살게 쫓아다니어서 더욱 애성이 받았다 (한설야, 『탑』)”, “구경을 가려고 골똘하다가 못 가게 되는 데 애성이 나서 어제 점심 저녁 두 끼니 물 한 모금 안 먹고 오늘도 머릴 싸고 누웠으니”와 같은 예문들 속에서 ‘애성이 받다’, ‘애성이 나다’와 같은 쓰임새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애성 받치다’는 ‘애성이 받다’와 같은 뜻이며 ‘받-’에 강세접미사 ‘-치-’가 결합한 형태인 셈입니다.
이렇게 ‘애성’을 받치는데 그런데도 아무말 못하고 애 닳아 할 때 바로 그때 참고 또 견디며 내는 소리가 바로 ‘숭불퉁 앓는 소리’입니다. 표준어로는 ‘볼 멘 소리’ 정도 될 테지만 ‘숭불퉁 앓는 소리’와 함께 자라온 사람들에게는 억제의 정도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볼’이 툭 불거져 불만이 입까지 찬 소리가 ‘볼 멘 소리’라면 ‘숭불퉁 앓는 소리’는 이를 악다물고 참고 견디려고 해도 저 깊은 가슴에서부터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이 밀물처럼 차올라 바늘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대성통곡이 날 지경인 경우에 어울립니다. 그러니까 목을 놓고 우는 일 밖에는 달리 저항할 방법이 없는 어린 아이나 아녀자들에게서 대개 ‘숭불퉁 앓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타이어 잘라 만든 ‘쓰리빠’로 따귀 벌겋게 얻어맞았지만 그 억울함 때문에 울음도 안 나오던 초등학교 2학년 시절에 ‘숭불퉁 앓는 소리’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 그 심정 때문에 지금에 와서 ‘숭불퉁 앓는 소리’의 심각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대한 글을 쓸 줄 또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떻든 이 “숭불퉁 앓는 소리”는 아마도 한자어 “흉복통(胸腹痛)”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흉’이 ‘숭’으로 소리 나는 게 보통입니다. ‘숭악헌 놈, 넘의 숭 잽히게 살먼 안 되야, 왜 넘 숭내내고 지랄이여’ 등이 모두 ‘흉’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런 것들을 유식한 말로 ‘ㅎ’ 구개음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흉복통’의 ‘복’이 ‘불’로 되는 것도 전주천변의 ‘한벽당’을 ‘한별땅’으로 부르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드물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역시 소리가 변화하는 어떤 현상의 소치입니다. ‘복’의 ‘오’가 ‘우’로 변하는 것은 근대국어 시기 이후로 꾸준히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소리의 변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떻든 한자어 흉복통의 순 우리말은 가슴앓이입니다.
이 글에 실린 이야기들은, 겨우 물알 든 보리 이삭 잘라다가 ‘청맥죽(靑麥粥)’ 끓여먹고 살던 시절, 오랜만에 곡기가 든 죽을 먹으니 별똥이 떨어지듯 눈물이 쏟아진대서 ‘별똥죽’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점잖은 분들은 눈물 섞어 먹는대서 ‘옥루죽(玉淚粥)’이라 불렀다던 그 시절을 밝히 되살려낸 정양 시인의 새 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
전라도 김제 땅을 예전에는 ‘볏골’이라 불렀고 그것을 소리가 비슷한 한자어 ‘벽골(碧骨)’로 썼다지요. 호랑이 청동검 차고 다녔을 시절, 이곳에 물 댈 저수지를 쌓느라 각지에서 모아놓은 농부들 뼛골 빠지게 흙을 날랐고 그 때 신발 털어 모인 흙이 산을 이루어 ‘신털뫼’가 되었다지요. 그 땅에 살며 ‘숭불퉁’ 앓았을 그 많은 안타까움들이 이제는 별이 되고 시가 되어 우리 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 언어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