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6 |
헤픈 인문정신, 《남극일기》
관리자(2005-06-13 16:30:53)
헤픈 인문정신, 《남극일기》
경건한 『남극일기』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 피를 데우는 책이라면 스콧의 『남극일기』(세상을여는창)에는 널브러진 몸을 추스리는 손길이 있다. 감동 뒤에 오는 부채 없음도 좋다.
로버트 팔콘 스콧은 남극탐험에서 아문센과의 경쟁에서 졌고 살아오지도 못했다. 그러나 썩지 않은 시신과 함께 발견된 그의 일기는 ‘위대한 실패’를 증명한다. 1912년 3월 29일, “우리는 쓰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기운이 빠져 있다…. 우리는 영국의 신사답게 죽을 것이다…. 곤란을 이겨내고 일치협력하여 불굴의 태도로 죽음을 무릅쓰고 겪은 이 강행군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다.” 탐험대 전원이 사망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는 그의 일기는 서늘한 감동을 준다. (사이드 선생께서도 이해하시리라). 그는 아문센이 생각한 정복의 속도전 보다는 지질학적 조사 같은 탐사에 순수한 기쁨을 보이면서 동료애를 지극히 중요시했다. 스콧은 개를 사랑하는 쫀쫀한 영국인답게 남극 탐험을 위해 설상차와 말을 준비한다. 그러나 모터 엔진은 얼음산에서 고철이 되고 말은 동상에 걸리고 말았다. 허스키를 잡아먹으며 에스키모 식으로 이동한 아문센은 정복의 가치로서는 한 수 위다. 그러나 극점에 도달 한 후 귀환하는 길에 물자 부족과 기상악화로 죽음을 앞두고도 동료에 대한 존경을 담은 스콧의 일기는 경건하다.
사이코의 남극일기
남극대륙 해안에서 가장 먼 무보급 횡단이란 탐험의 질 때문에 한국탐험대에게는 개썰매 대신 도보행군이 선택된다. 걷는 것만이 실존을 증명하는 얼음대륙은 화이트 아웃(원근감 상실), 블리자드(눈보라 현상), 크레바스(빙하 속의 균열)로 하여 6명 대원들의 발목을 잡아챈다. 누구나 두 발로 걸으며 썰매를 끌어야 하는 평등함은 동료에 대한 무한의 신뢰와 인화를 요구하는데… 영국 탐험대가 남긴 오래된 노트를 발견한 후부터 대원들 사이에는 원인 모를 공포가 크레바스 틈새처럼 조금씩 그 폭을 넓힌다. 이 균열의 과정을 카메라는 훔쳐보는 시선을 갖는데 그 주체는 바로 남극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군가 지켜본다는 느낌이 공포의 시작인 것. 불행은 혼자 오지 않기에, 남극에 없는 바이러스로 한 대원이 낙오되면서부터 수려한 달력영화는 미스터리 스릴러로 바뀐다.
캡틴 최도형(송강호)의 과도한 목적지향적 집착에 선상반란을 꾀하지도 못하고 그저 보병처럼 걷는 대원들은 상황을 분석하고 위로를 나누는 것이 없다. 당연히 유기체로서 관절의 기능을 상실한다. ‘온갖 선이 모여드는(라인홀드 데스너의 표현이다)’ 대륙 극점의 등정을 이룩한 철인 최도형은 팀이 언 빨래처럼 빠각거리자 유일한 통신수단인 수신기를 삼켜버리고 (돌아갈 배를 불지른 코르테즈, 먹을 쌀을 태우고 솥을 부숴 버린 항우, 나침반을 바닷물 위에 던져버리고 항해를 한 바스코 다 가마가 그랬다). 최도형에게 냉혹은 있어도 에이하브 선장 같은 매혹이 없다. 야심은 탐욕으로 변해버렸기에. 그래서 안타깝다. 보스 아닌 리더라면 조직을 장악하면서도 때론 자신의 욕망 정반대 지점에 설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어린 자식의 애비이고 노모가 걱정하는 아들 아니던가. 하여, 삽입한 도형 아들의 추락 에피소드는 그의 억압기제가 지극히 개인적인 바탕임을 드러낼 뿐. 뱀 신발 같다.
시간이 제한적일수록 탐욕은 커지기 마련. 눈 나쁜 부대장의 안경을 부러뜨리고 동상으로 썩은 대원의 다리를 자르는 얼음 심장을 가진 송강호는 결국 극점에 도달한다. 여기서 막내대원 김민재(유지태)를 만난 그는 “어 민재 왔구나?”라는 대사를 친다. 역시, 송강호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해일에게 던진 “밥은 먹고 다니나?”는 애드립을 뛰어넘는 대단한 순발력아닌가. 결국 극점이 ‘그냥 하나의 점’일 뿐이란 걸 깨달은 그는 유지태에게 “니가 나를 멈췄어야 해. 내가 이거 미쳐 가는데, 니가 날 멈췄어야지.” 라며 싸이코에서 인간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신인감독의 남극일기
인간은 유한한 기억력 때문에 글을 남기고 그림을 그린다. 그래도 안 되니 돌에 새기는 거라. 그러나 방한이 뛰어난 ‘노스 페이스’를 입은 한국 탐험대는 누구도 일기를 쓰지 않는다. 단지 디카를 눌러댈 뿐. “우리의 욕망이 여기를 지옥으로 만들었다”라는 영국 탐험대의 기록이 공포를 일깨우지만 일기를 쓸 줄 모르는 그들은 자신을 객관화시키질 못한다. 세상에, 얼음구덩이서 발견한 80년 넘은 일기를 그냥 “너 가져”하다니, 오, 문사철(文史哲)의 소양이 전혀 없는 그 인문정신의 헤픔이여! 일기가 혼과의 대화임을 모르는 거라. 삽질하는 보병이라면 몰라도 오래도록 사선을 넘나들며 죽음에 대한 각인과 관조를 거친 이들이 과연 이런 대사를 뱉어도 된단 말인가. 그들에게 심미적 이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이건 탐험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감독이나 배우에게 꼭 말러를 들으라거나 『공산당선언』을 읽으라는 말이 아니다. 교양을 가진 탐험가의 형상화가 아쉽다는 이야기다.
구상에서 개봉까지 7년, 뉴질랜드 로케이션 등 대단한 외연이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돈 준비하는 데만 7년이 걸린 것을 보면 있을 수 있는 일. 공포감에 따른 이기심이나 광기라는 단선적 이야기에 쏟아 부은 제작비 85억 원으로 그려낸 남극이라는 미지의 대륙은 인간을 극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 악세사리로 그치고 만다.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배경음악으로 깔면서 긴장에 이르긴 하되 적절히 풀어주는 배려도 부족하고, 세트와 로케가 너무 쉽게 드러나는 것도 약점. 초반 느린 화면의 버즈 아이샷이 주는 스펙터클한 설원 그림 몇 장 빼고 후반부로 갈수록 몽타주로만 가고 만 것도 안타깝다. 사운드 이펙트나 점프 컷 만으로 긴장을 주는 방법을 택한 감독 임필성은 스스로를 최도형이라 믿은 것 같다.
나의 남극일기
수직에 이르는 고상한 정열 뒤에 다시 수평의 정상에 이끌린 박영석.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그는 6명의 동료·셰르파를 눈밭에 묻었다. 28번 도전해 50%의 성공률을 기록하는 동안 10명의 동지를 잃은 엄홍길과 또 매킨리에서 돌아오지 않은 우에무라 나오미 같은 이들의 절절한 외로움과 고귀한 자아를 바랬다. 아니었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 고양된 감정의 정화가 있을 법한데 모두 공포에 묻혀버렸다. 무한성의 추구가 재앙을 낳는다는 설정은 얕은 크레바스에 다름 아니다. 낯선 남극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라는, 딱 거기까지 일뿐. 이틀이면 눈이 녹는 나라에 사는 우리에게 남극은 돈으로 갈 수 없는 동네이기에 매력적인 영화 공간이다. 남극의 극한을 견디는 행태가 과연 우리사회의 압축된 근대화의 수단주의 혹은 ‘하면 된다’는 집단광기를 표현한 것이라면, 글쎄, 꼭 배경은 남극이 아니어도 좋았으리라.
사막, 설산, 절해고도의 배경은 인간을 돌아보게 한다. 응시하는 화면 속의 그가 고독한 나로 투사될 때 우리는, 운다. 그러나 국제영화제 폐막식 푹신한 의자에 앉은 1,800명은 남극 탐험대의 광기와 고통을 보고서 누구도 울지 않았다. 며칠 후, 아카데미아트홀 지하에서 나는 울었다. 불과 대여섯 명이나 보았을까. 일본 도심의 4남매에 꺼이꺼이 울었고, 요 몇 일 전에는 사막에 사는 쿠르드족 어린이 땜에 또 울었다. 나를 울게 한 영화 두 편을 문장으로 만들면 이렇다. 《거북이도 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