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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6 |
인도양에 무릎을 꿇었다
관리자(2005-06-13 16:30:00)
인도양에 무릎을 꿇었다 | 유용주 시인 좋은 인연으로 먼 여행을 하고 왔다. 부산항에서 출발해서 아랍 에미리트 두바이까지 17일 간의 항해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선 외국여행길이라 잔뜩 긴장했다. 같이 어울려 갔던 동료들은 모두 외국 여행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단체생활이라고는 군대생활 밖에 해보지 못한 나였기에 더욱 그랬다. 매사에 조심했다. 폐쇄된 공간에서 늘 부딪히는 사람들이 뱃사람들이다. 무엇보다 땀 흘려 일하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피해주지 않으려고, 또 그들의 긴장과 외로움에 대해 배려하고 배우려고 노력했다.   날씨는 순풍에 돛단 듯 하였다. 하느님이 일부러 도와주시는 것 아닐까 할 정도였다. 17일 동안 단 한차례, 그것도 한두 시간 정도 비가 내린 날 말고는 쾌청했다. 우리는 눈이 볼 수 있는 한계까지 하염없이 바다를 봤다. 끓는 용광로 속으로 첨벙 해가 떨어지면, 기다란 수은 막대기를 뒤에서 밀며 달이 떠올랐고, 별이 이마에 내려앉아 몸살을 앓으면 어머니 치맛자락 같은 구름이 서늘한 손을 내밀어 씻겨주었다. 돌고래는 장난기 많은 아이처럼 솟구치고, 날치 떼는 파랑새처럼, 잠자리처럼 수면 위로 수평으로 날다가 바다 속으로 투신했다. 바다뱀도 보고 아구와 비슷한, 숭어와 비슷한 고기도 만나고, 큰 가오리가 나비처럼 수영하는 것도 보았지만 아깝게도 고래와 바다거북은 만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 현장 체험한다고 조리실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뜨면 밥 먹고, 해지면 술 먹고, 탁구로 몸 단련하고, 본능에 충실한 영화도 보고, 만화도 보고, 해적당직도 서고, 재난대비 훈련도 받으면서 우리는 서서히 구릿빛 얼굴이 되어갔다. 드디어 해적들이 득시글거리는 말라카 해협을 빠져나와 인도양으로 들어서자 현대 하이웨이호(2만 2천 톤급 컨테이너선) 선원들과 우리들 모두는 한시름 놓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심 5천미터―. 지리산을 통째로 두 개를 갖다 놓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인도양. 그 맨 밑바닥을 생각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 캄캄한 곳을 떠올렸다. 눈과 귀가 퇴화되고 오로지 배설기관만이 발달된 어떤 물고기가, 플랑크톤이, 갑각류나 새우 같은 생명들이 엄청난 수압을 견디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항해 끝나기 3일 전, 아버지 기일이었다. 조촐하게 술 따라놓고 절만 하려했는데, 동료들과 선장님 배려로 제법 푸짐한 상이 차려졌고 양주를 큰 잔으로 따라 올렸다. 84년 5월,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때 임종을 지키지 못해 늘 가슴에 대못을 품고 살면서도 울지 못했는데 바다에서는 울음이 터졌다. 엎드려 운 곳이 윙브릿지 바닥이었다. 이십 년이 넘으면서 어느덧 뱃살이 출렁거린다. 흰머리가 늘었다. 자고나면 침이 베갯머리를 물들인다. 술 욕심이 많아지고 노여움이 늘고 편한 그늘을 먼저 찾는다. 설거지와 빨래와 청소하기가 싫어졌다. 저 블루사파이어 녹여 놓은 듯 출렁이는 바다가 내 바닥인 듯 춤추고 노래했던가. 별빛에 취하고 달빛에 취하고 바람에 취해 여기까지 왔던가. 지금 이 시간에도 50도 가까이 육박하는 기관실에서 땀범벅 기름범벅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는 갑판원들은 누구인가. 밤을 꼬박 새면서 당직을 서고 있는 항해사들은 누구인가. 그해 여름 땀이 소금으로 변해 서걱거리는 옷을 털지도 못한 채, 어디 단칸방 하나 구하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면서 굶어 쓰러졌던 현장을 떠올리며, 나는 인도양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추레한 사내의 눈물방울은 희미하게 물길을 이루어 바다에 떨어졌다.     유용주 | 1960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199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시 「목수」외 2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해다. 1997년 제15회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았다. 시집으로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장편소설 『마린을 찾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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