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6 |
악흥의 순간
관리자(2005-06-13 16:27:55)
악흥의 순간
지난 주 어느 날 아침, 허둥지둥 아이 밥을 차리다가 최근에 얻은 슈벨트의 CD를 틀었다. 바이얼리니스트 길 샤함과 기타리스트 외란 쇨셔가 협연한 명곡집인데, 그 중 네 번째 트랙이 「악흥의 순간 제 3번」이다. 피아노 독주곡을 편곡한 건데, 기타로 연주되는 도입부가 피아노로 들을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젊은 무용수의 탄력 넘치는 스텝이 연상되었고, 몇 초 더 듣다가 결국 나 역시 냉장고 옆에 숨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을 알아듣는 파도들처럼 가볍게 일렁이는 기타와 바이얼린 소리가 절로 『호두까기 인형』에 나오는 사탕요정의 춤 비슷한 동작들을 취하게 했다. 매일 빡빡한 일정과 온갖 세사에 짓눌려 사는 내가 몇 초 동안이나마 아무 생각 없이, 그것도 발랄한 기쁨에 넘쳐 요정의 춤을 추게 된 것은 순전히 슈벨트와 쇨셔 덕분이었다. 다른 날 같으면 초조하고 조급했을 출근 시간이지만 그 날은 잠시나마 다른 시간으로 빠져나간 느낌, 다른 나라로 탈출한 느낌이 들었다.
그 며칠 후, 예술의 마력을 보여준 또 다른 일이 생겼다. 학생들이 쓴 문화 관련 글을 읽다가 익산 시내에서 공연된 한 연극의 관람기를 보았다. 연극은 젊은 나이에 결혼해 남편과 아이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정하며 살아온 한 주부가 이제 각자 자신의 세계를 마련한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벽을 상대로 독백을 하며 살던 중, 우연히 그리스 여행에 나서게 되고, 거기서 한 남자와의 사랑을 통해 까맣게 잊고 있던 자신을 되찾는다는 내용이었다. 갓 스물인 그 학생은 이 극을 보고 그 때까지는 상상해 보지도 못한 주부로서의 삶을 간접 경험했고, 나아가 자신의 엄마와 언니들을 그 자리에 초대해 그들이 겪었을 외로움과 허탈함을 뒤늦게나마 감싸고, 위로하고,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에 잠겼다 했다. 그 학생이 다면적이고, 충실하고, 사려 깊고, 진정 아름다운 여자로 자라려면 이런 체험이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되풀이되어야 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연극 관람은 그녀에게는 그야말로 소중한 첫경험이었을 것이다. 한 집에 사는 엄마가 빈 둥지의 허전함에 고통 받을 때,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젊은 딸은 그런 사실을 짐작도 못한 채 자신의 생활에 열중했고, 예술은 그처럼 이기적인 그녀에게 아주 부드러운 방식으로 이해와 깨달음의 기쁨을 가르쳐 주었다.
예술은 이처럼 우리를 일상에서 잠시 들어올려 제3의 눈으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하고, 현실에서는 만나기 힘든 지고(至高)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한다. 영국의 작가 월터 페이터는 인간을 “불확실한 기간 동안 집행을 유예 받은 사형수”에 비유하면서, 인생의 최고 목표는 “그 기간을 확장하는 것,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의 설렘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설렘을 제공하는 요소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예술이며, 예술은 오직 그 순간을 위해, 우리에게 최상의 시간을 제공해 준다고 했다. 그리고 “늘 이 단단하고 보석 같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 이 황홀감을 유지하는 것이 인생의 성공” (『르네상스』, 캘리포니아대 출판부, 1980년, 189-190쪽)이라고도 했다.
이처럼 인간의 영혼을 확장시키고, 우리의 삶에 조화와 깊이를 주는 예술을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누리고 있을까? 이 푸르른 오월에 지역 문화 시설들의 공연 및 전시 일정을 훑어보는 내 마음은 어둡고 착잡하다. 20세기 말, 놀랍도록 크고 장대한 문화 시설들이 전국 곳곳에 앞다투어 지어졌고, 이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좋은 공연이나 전시를 보려면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가야 했던 이들은 비로소 문화의 사각지대에서 벗어나게 되는 줄 알고 다들 기대에 부풀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일 년에 너댓 번 있는 수준 높은 공연 이외에는, 차마 아이에게 보여주기 무안할 정도로 엉성한 아동극, 낸 돈이 아까워 화가 치미는 유치한 전시들이 전부였고, 이런 전통은 금세기에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돈 들여 품격 높은 공연이나 전시를 준비해도 관객이 안 들면 손해를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그런 일도 자주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문화는 경제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존재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그토록 거창한 공연장, 전시장을 지었으면, 세금이든, 기금이든, 관람료든, 그 어떤 돈을 들여서라도, 한 달에 한두 번은 볼 만한 공연을 제공하는 게 주민, 아니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고 있을까? 21세기의 한국에 사는 대여섯 살 꼬마들의 일상에 문화는 끼여들 틈이 없다. 한글, 영어, 태권도, 발레, 스케이트, 미술, 한문, 레고에 블록, 심지어 경제 교육까지, 매일 같이 이어지는 교육의 행진에 문화는커녕 동무와 놀 시간도 없는 게 현실이다. 물론 이 아이들 중 대다수는 피아노학원에서 상당 시간을 보내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처럼 계속되는 교습 동안 그 중 몇 명이 페이터가 말하는 미학적 기쁨을 누릴지는 알 길이 없다. 이렇게 시작된 아이들의 아찔한 나날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한자, 속셈, 제 2의 악기, 영어 문법과 회화, 미국 교과서, 체육 등, 성적과 관련된 또 다른 과외들로 더욱 분주해지고,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사당오락(四當五落), 하루에 네 시간 자면 대학 가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필사적인 스케줄로 악화된다. 그런데, 이렇게 치열한 공정을 거쳐 제조된 우리의 지성들은 토플 점수 최저에 논술 능력 최하, 국제 매너 최악에다, 다른 나라 학생이 동양인이라고 두보(杜甫)나 노자 얘기를 물으면 딴 나라 사람들이라고 둘러대고, 대화 중에 도스토옙스키나 람세스 2세를 들먹이면 ‘이 자는 왜 이리 현학적이야’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째려본다. 물론 그 인재가 현학적이란 말을 아는 경우에 그렇다는 얘기지만.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뉴요커』지를 보면 앞 부분에 그 주에 열리는 각종 문화 행사의 목록이 나온다. 연극을 필두로 음악, 무용, 각종 공연, 미술 전시회, 도서관 행사, 전람회 등의 제목과 일시, 장소, 연락처, 그리고 사진과 간단한 평이 여러 페이지에 걸쳐 빼곡이 실려 있다. 최근에 읽은 건데, 세계 젊은이들이 뉴욕을 동경하고 평생 한 번이라도 거기서 살아보고 싶어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렇게 다양한 문화 체험 기회 때문이라고 한다. 젊은이 뿐이랴.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바 아니겠는가. 오늘은 뉴욕 시티 발레의 공연을 보고, 내일은 컬럼비아대 앞에 나가 헌책과 음반들을 뒤적거리고, 밤에는 브로드웨이에 가서 연극 하나 보고, 다음 주는 일 주일 내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명화와 조각들을 만나고, 주중 어느 하루는 애버리 피셔 홀에서 열리는 독주회도 보고, 재정적으로 조금 무리를 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리는 오페라도 한 편 보면 얼마나 좋겠는가! 뉴욕에서는 일 년에 오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각종 공연과 전시회를 관람한다고 하니 도시로서는 그야말로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할까’. 사람들이 세계 전역에서 제 발로 몰려와 돈을 쓰니 경제적으로 이익이고, 자기 도시 주민들에게는 저절로 최고 수준의 볼거리들을 제공할 수 있으니 참으로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사당오락에 매달리지 않아도 명작을 쓰고, 우아하게 행동하고, 최고 상품을 디자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인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는데, 나는 왠지 좋은 공연이 그립고,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갈 알찬 전시회가 그립다, 푸르른 날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