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6 |
<부안>‘관광부안’, 개양할미 설화의 원형에서 찾아라
관리자(2005-06-13 16:19:36)
‘관광부안’, 개양할미 설화의 원형에서 찾아라
| 허철의 사진작가
가장 부안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지역 이미지 제고에 몰두하고 있다. 문화상품을 개발해 축제로 연결시키고, 군수가 직접 '우리 ○○군으로 오세요!'하며 광고도 한다. 자기 지역을 알리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 지역의 경제활성화를 꾀해보겠다는 노력, 긍정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자체들은 자기 지역만의 고유문화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몇몇 지자체를 빼고는 차별성 없이 천편일률적이어서 식상하다. 아전인수식으로 타 지역의 문화를 끌어들이질 않나, 또 어느 지역의 브랜드인지 개념설정부터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고, 지역 축제의 경우 지자체장의 낯내기 행사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아 세인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관광부안’을 표방하는 부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아직도 ‘관광=개발’이라는 도식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변산하면 구불구불 아름다운 해안일주도로가 자랑거리인데도 이 산 저 들 가로지르며 죽 뻗는 고속화도로를 내야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해치면서까지 유흥시설을, 골프장을 지으려 하고 있다. 그동안 라이프스타일도 많이 바뀌었다. 이젠 먹고, 마시고, 노는 관광이 아니다. 테마가 있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관광을 선호한다. 그리고 부안을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바다의 부안’을 찾는다. 그런데도 부안은 ‘바다=해수욕장’이라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 그러다보니 해수욕장, 채석강 등의 변함없는 관광코스에 의존한다. 서해안고속도로 개통, 주 5일제의 호재를 놓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민선시대에 접어 든 후로 지자체 장들로부터 '글로벌'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자기 지역을 세계화시키겠다는 열정은 높이 살만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영문 브랜드, 로고, 간판에 그치고 마는 싱거운 경우를 자주 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면, 역설적으로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을 것이다. 영문으로 이름 짓고, 영문간판 내건다고 세계화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차별된 그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여야 세계는 주목한다. 그렇다면 부안의 고유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서해바다 창건주이자 지킴이인 개양할미 설화의 원형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해양문화를 일궈 온 부안
부안이 어떤 곳인가? 산과 들과 바다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산세는 수려하고 들은 넓은데다 남쪽의 줄포에서 북쪽의 동진면까지 해안선 길이가 무려 99킬로에 이르고, 이 해안선을 따라 줄포, 구진, 까치당, 모항, 언포, 궁항, 마포, 대항리, 해창, 계화도에는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다.
일찍이 이러한 자연환경에 터 잡은 우리의 조상들은 산에 올라 나무하고, 들에 나가서는 농사짓고, 그리고 하루에 두 번씩 어김없이 들고나는 갯벌에 나가 갯살림을 꾸리며 질척이는 삶을 이어왔다. 계화도 산상의 신석기시대 유적, 부안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 대항리조개무지, ‘중요무형문화재 위도 띠뱃놀이’, 그리고 곳곳의 독살 터,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어전어업, 천일염전 등의 흔적이 그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초기삼국시대부터 국가적 바다제사를 지낸 ‘죽막동제사유적’이 있고, 해신 개양할미 설화가 서려 있다.
해신 ‘개양할미’ 전설이 서려있는 곳
변산반도 서해 끝단인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적벽강 용두암 (사자바위) 절벽 위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 58호 수성당이 있다. 이 당집은 여해신(女海神) 개양할미를 모신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수성당할머니인 개양할미는 아득한 옛날에 수성당 옆의 ‘여울골’에서 나와 서해바다를 열었다. 그리고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려 지나는 선박의 안전을 도모하고, 어부들로 하여금 풍어의 깃발을 올리게 했다고 한다. 이러한 개양할미를 물의 성인(聖人)으로 여겨 수성(水聖)이라 부르고, 여울골 위 절벽 위에 수성당을 짓고 모셔왔다. 수성당을 개양할미와 개양할미의 딸 여덟을 모신 곳이라 하여 구랑사(九娘祠)라 부르기도 한다. 개양할미는 딸 여덟을 낳아 각 도에 바다지킴이로 보내고, 자신은 막내딸과 함께 이곳에 머물며 서해바다를 총괄했다고 한다. 더러는 딸들을 칠산바다 지킴이로 보냈다고도 한다.
그런 개양할미는 어찌나 키가 크던지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곰소 앞바다에 있는 ‘계란여’라는 둠벙에 빠져 버선목이 좀 젖었다고 한다. 그러자 개양할미가 치마에 돌을 담아다 이 둠벙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거녀(巨女)였으면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았을까. 여해신의 거대 막강한 신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예부터 바다에 국가적 제사를 지내왔던 곳
그렇다면 수성당은 언제부터 이곳에 있어 온 것일까. ‘道光 三拾年 庚戊 四月二十八日 午時 二次上樑’이라는 상량문 기록으로 보아 1850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1992년 전주박물관에서 이러한 개양할미 전설이 서려있는 수성당 주변을 발굴하여 삼국시대 초기 이래로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왜 국가적인 큰 제사터가 수성당에 있었을까. 지정학적으로 수성당은 선사시대 이래 중국이나 북방의 문화가 한반도 남부로 전파되던 해로상의 중요 지점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삼국시대가 되면 초기백제의 근거지인 한강하류유역으로 통하는 길목이 되고, 5세기 후반 백제가 남천한 후에는 웅진과 사비로 들어가는 길목이었으리라. 또한 이곳의 해양환경을 살펴보면 연안반류(沿岸反流)가 흐르고 주변에 섬들이 많아 물의 흐름이 복잡하며 바람도 강해서 예로부터 조난의 위험이 컸던 곳이다. 그러기에 이곳에 신당을 짓고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상량문 기록과 무관하게 수성당의 연원은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고, 또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의 가슴 속에 개양할미가 살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바뀜에 따라 사람들은 개양할미의 그 거대 막강한 신력을 거부하고, 개양할미의 그 자연친화적 순응을 거스르려고만 한다. 바다는 개발의 대상이 되어 황폐화되어가고 있고, 어촌공동체는 무너져가고 있다. 수성당 지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만금사업, 위도핵폐기장 등이 그것이다.
관광부안, 답은 바다에 있다
개양할미의 신력이 아직은 막강해서였던지 일찍이 백제는 해상왕국을 이룰 정도로 바다를 잘 관장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역대 왕조들은 바다를 멀리 해왔다. 우리의 그 뿌리 깊은 유교사상과도 무관치는 않으리라. 사농공상(士農工商)에도 끼지 못하는 게 어부라는 직업이다. 어부들은 목숨 걸고 고기 잡아 왕후장상, 양반들의 입을 호사시켜주건만, 그들은 대뜸 ‘뱃놈’이라 부르며 어부들을 천대했다. 그러한 문화는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다. 입으로는 '블루 레볼루션'을, 즉 ‘인류의 미래는 바다에 있다’고 외치면서도, 산 깎아다가 갯벌을 모조리 메우고 있다. 그러니 상처투성이인 국토는 차치하고라도 고기들이 연안에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다. 그래도 입맛은 살아있어 생선 수입해 포장 뜯어보니 납꽃게, 납병어, 납조기에 납갈치 아니던가.
해안선 다 망가지고 고기 사라진 바다를 누가 찾을까? ‘관광부안’, 그 답은 바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