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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6 |
<공원>공원, 그림속으로 들어오다
관리자(2005-06-13 15:53:21)
공원, 그림속으로 들어오다 | 조병철 화가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문제작 <풀밭위의 식사>가 파리 살롱 전 낙선 작 전시에 발표되었을 때 마네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맹렬한 비난과 항의를 한 몸에 받았다 한다. 어쩌면 그는 한 세기 전 계몽주의적 사상가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의 사상적 영향으로 깨어났고 파리의 부르주아(시민), 중상인 들에 의해 성공한 프랑스 대혁명(1789~1794)의 사상적, 문화적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일약 세상의 주목을 끌게 만든 이 작품에서 그는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1606~1669)에 의해 발전된 ‘빛’을 작품 속 공원 숲 속의 짙은 그늘과 대비시켜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빛에 의해 사물이 화면가득 드러나는 ‘인상주의 회화’ 탄생의 결정적 역할을 하는,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에서 그 빛은 왼쪽 하단의 보자기 같은 천 주위로 널려있는 바구니 빵과 과일 쪽에서 시작되어 나신의 여인을 지나 대각선으로 또 한 명 속옷차림으로 냇가에 몸을 씻고 있는 여인을 비추이다 숲을 빠져나와 들판을 가로질러 나간다. 연인들의 이야기라는 주제의 측면에선 전통과 도덕을 등에 업고 겉으로만 근엄한 척하던 당시 사회의 이면을 중산층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발가벗기는 발칙한(?) 행동을 감행함으로써 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아니 어쩌면 교양인인 척 호들갑을 떨며 관습에 얽매여있던 보수주의자들의 논쟁을 통해 이 그림이 유명세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작금의 시대적 상황으로 반추해보면 전혀 외설스럽거나 천박해 보이지 않지만 마네는 이어 발표한 또 다른 문제작 <올랭피아>를 통해 당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또 한 번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들여 작가로서 자신의 생각을 더욱 분명히 보였고 그로 인해 화가로서의 지위도 확고히 다지는 결정적 계기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점이 많은 그림이다. 파국(波國) 김주경(1902~1981)의 <부녀 야유도 (유채, 1936)>를 두고 미술평론가 최열은 그의 최근 저서 『화전(畵傳)』에서 ‘가까이 가고 싶은 유혹!’이라며 그림 속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 했는데, 아마 내 기억으로는 근대적 개념의 공원 그림으로 처음이지 않나 싶다. 그의 글처럼 이 그림은 쾌청한 가을날 빛의 옷(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많은 여인의 무리가 화면 중앙의 위쪽 고목나무 왼편에서 빨간 기를 들고 경기를 진행하고 있는 유니폼 입은 남자의 지시아래 나뉘어 있고, 또 위쪽엔 홍·청의 깃발을 들고 줄을 서서 어딘가를 향하는 여인들과 오른쪽 상단의 또 다른 남자를 중심으로 보물찾기를 하듯 무언가를 찾는 여인들과 나무에 올라간 여인, 머리를 묶는 여인, 속치마를 다시 고쳐 매는 여인, 드러누워 다리를 오므리고 자는 여인, 앞쪽에서 모로 누워 뒤태를 보이며 베개 벼고 자는 여인, 덥다고 겉치마를 흘러내린 여인, 버선을 벗은 여인, 붉은 과일을 앞에 두고 붉은 저고리에 볼도 붉은 젊은 부인, 서구식 보온물통을 뒤로하고 머리엔 리본을 묶고 치자색 치마에 육감적인 뒤태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여인, 그 둘 사이를 고개 돌려 바라보는 여인, 또 뒤로 양식 치마를 입은 젊은 소녀와 댕기머리의 여인, 사이좋게 엎드려 누워 얘기하는 여인 등등 백여 명에 가까운 여인들이 무슨 특별한 행사를 알리는 긴 천막을 가로 친 넓은 공원에서 고목나무를 사이에 두고 마치 강강술래라도 하듯 자유롭고 여유로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하루를 만끽하고 있다. 믿기지 않는 풍경이다. 1936년 식민지 시절 조선에 어디 이런 호사스런 풍경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작가의 나이 서른넷에 일본 유학(일본 외광파의 영향을 받음)을 다녀와 결혼을 하고 가족을 둔 작가는 역설적이게도 식민지의 현실을 외면하고 그림 속에서 이런 희망가를 불러보았는지도 모른다. 한때 한국의 인상주의 화가 오지호와 2인전을 열며 비평활동을 전개하기도 한 김주경은 1945년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조선미술가동맹,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에서 활동하다 월북, 평양미술대학장을 지내며 사회주의 미술의 터전을 닦았다 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그림을 살펴보기로 하자, <두만강 푸른물에 (유채, 2000)>라는 전주 경기전의 일상풍경을 그린 이 그림을 두고 월간미술 2004년 3월호에 실린 <사회적 시공간과 한국 현대미술>에서 강수미는 이렇게 썼다. “스냅사진이 일상의 한 시공간을 절단하듯, 이 그림은 한때 아주 흔했고, 지금도 행락철이나 노인들이 모여 있는 공원에 가면 마주칠 수 있는 별 의미 없을 수 있는 우리의 현재를 표상하고 있다. (작가는) 진부함의 종합이라도 보여주려는 듯 작품제목에서부터 그림 안 인물의 표정에 이르기까지 통속적 메시지를 기입하고 있지만 그림은 스냅사진을 모방하면서 ‘코드 없는 메시지’가 되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전주에서 작업하는 이른바 ‘지역작가’ 조병철의 그림에는 이렇게 통속성으로 차폐한 혼란스런 ‘비의미’가 있다. (중략) 우리는 그것을 ‘지역성’이라 규정하며 손쉬운 방식으로 미술담론의 생산 장에서 소외시켜 왔다. 그림의 전면에 내걸린 상투적 요소가 어떤 유혹을 유발하거나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기회조차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지역과 지역미술은 실상 그 모든 것이 기표가 아니라 실제 현실인데서 오는 ‘번역 불가능성’ 때문에 중심으로부터 더욱 소외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이 글에서 마네와 김주경 또 나의 그림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신비화하려는 ‘발칙한 상상’을 시도하려는 게 아니라 ‘일상’과 ‘지역적 차이’에 의해 드러나는 ‘현실의 조건’들에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적 필연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과, 그것은 때론 평범한 ‘삶’이거나 ‘문화’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며, 하나의 ‘사상’이거나 ‘예술’일 수 도 있으며, 또 역사적 귀결이기도 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는 한가로운 공원을 거닐면서 ‘쉼’을 통해 호흡을 가다듬고 또 다른 새로운 가능성들을 그 ‘여유로운’ 공간 속에서 발견하고 실현할 수 있다는 꿈을 찾게 될 것이다. 나는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국권상실의 울분을 견디지 못하여 중국에 망명하고 임시정부 독립운동에 가담한 뒤 침략자를 응징하고 붙잡혀, 꽃다운 나이에 불후의 민족혼이 되어버린 윤봉길(1908~1932) 의사의 기념관 ‘매정’과 근대 중국혁명의 아버지 루쉰(1881~1936)의 조각상을 대하며 갖은 생각에 잠긴 적이 있다. 그것은 물이 흐르는 공원 한쪽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어깨춤을 추던 초로의 할머니와 마천루가 즐비한 신도시 푸동 지구의 화려한 야경 속에서 본 현대 중국의 이미지가 강하게 대비되어 느껴졌던 인간의 역사에 대한, 미술의 역사에 대한 ‘사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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