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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6 |
<공원>공원(公園), 혹은 공원(空圓)
관리자(2005-06-13 15:47:07)
공원(公園), 혹은 공원(空圓) |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 엇보다 산책은 스캔들의 고통을 희석하거나 숨기기에 쓸모가 있다. 대체로 스캔들의 본성이란, 다독이면 다독일수록 더 불거지는 남자의 성기처럼, 캐면 캘수록 확산된다는 데에 그 저력이 있다. 스캔들의 피해자들은 끊임없이 꼬리를 감추는 그 ‘의도(意圖)’에 감시당할 뿐만 아니라, 그 의도의 뿌리를 캐려는 의도 속에서 스스로 무기력해지는 이중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수하는 법이다. ‘소문’을 믿지 않는 것에 인문학 공부의 근본을 두는 이유도 곧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생이야 워낙 어리석음의 도가니이고 또 그것 자체로 스캔들이지만, 산책은 그 중에서도 빼어난 현명함이다. 그 현명함은 우선 ‘의도의 바깥’으로 외출하는 여유, 그리고 그로 인한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미 오랫동안 당대 최고의 스캔들이었던 루소(J.J. Rousseau, 1712~1794)는 50대 중반에 들면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Les Rev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의도와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다른 세대가 오더라도 요원한 일이라고 결론을 짓고, 스스로 그 의도의 밖으로 ‘산책’을 나서기로 한 것이다. 루소는 볼테르와 다르게 그를 지목한 스캔들에 깊은 상처를 받으며 괴로워한 인물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계몽주의의 신(神)’이었던 볼테르와는 매우 다른 맥락에서, 루소 역시 자신의 스캔들과 상처를 거치면서 스스로 신(神)이 되어 버린다. 요컨대 그의 산책록은 그가 신이 되는 길에 대한 몽상이다: “내가 지상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나에게 악도 선도 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는 이미 아무것도 바랄 것이나 두려울 것이 없어졌다. 나는 지금 함정의 심연에 빠진 불행하고 가련한 인간이면서도 흡사 신과도 같이 평화롭고 태연하다”1) 오히려 인공의 공원이라는 공간을 특권화할 일은 없다. 다만, 그 모든 산책로에서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모두 바로 그 ‘마음’이 없는 자연물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노릇이다. 그러므로 상처받은 자연주의자 루소처럼, 의도 속에서 회전하며 복제되는 스캔들의 피해자들, 곧 인생에 지친 자들이 산책에 나서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쌍소(Pierre Sansot)는 그의 별볼일 없는 책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속에서 “빠름은 자신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2)이라고 한다. 사실, 상처의 가장 명백하고 치명적인 특징은 반복이며, 쌍소의 말에 뜻이 있다면, 산책은 무엇보다도 상처가 반복! 되는 일상적 삶의 계선을 끊어버리는 느림의 실천 속에서 그 효용가치를 얻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느림’은 특정한 물리적 속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까지 담아내는 속도(velocity)에 가까운 것이며, 더 나아가 그 속도를 각자의 삶이 결절하는 모습으로 다룸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개념이다. 실은 공원의 수사학이란 공소하다. 아무래도 도시 속의 공원이란 필경 도시의 알리바이, 그 속도주의적 성장의 구실에 불과할테다. 그러나 공원이든 무엇이든, 어떤 공간 속에 참여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고 각자의 삶이 일상의 속력과 방향을 재조정하면서 자그마한 결절을 맺으며 미래를 재조명할 수 있다면, 공원(公園), 혹은 공원(空圓)으로서의 그 사회적 가치는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F. Bacon)에 따르면, 좋은 말(馬)은 무엇보다도 질주하는 도중에 급히 설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가늠하고, 좋은 말(言)의 특징 역시 미끌어지는 자신의 말을 중단할 줄 아는 지혜 속에서 측정한다. 공원(公園)이 공원(空圓)이어야 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그 텅빈 원 속에서, 자본과 욕망의 계선을 쫓아 질주하던 자신의 삶을 중단시킬 수 있는 여유, 그리고 그 삶의 계선과 방향을 다시 음미하고 조정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 공원(空圓)으로서의 공원(公園) 말이다. 어느 사상가의 말을 원용해서 정리하자면, 공원의 뜻은 ‘이성의 빛’에서 물러나와 ‘존재의 빈터’를 체험하는 시공간의 판타지에 다름 아니다. 산책, 혹은 공원의 체험에서 인생의 이치를 배우는 일은 역설적이다. 자연을 흉내내는 공원은 오히려 자연이 아니다. 『동문선(東文選)』을 보면, 자신들의 집안에 이른바 ‘가산(假山)’을 만들어 아끼고 완상하는 우리 선조들의 취미를 엿볼 수 있는데, 공원의 체험 역시 가산처럼 그 요체는 인공(人工)의 작위라는 점이다. 이로써 공원 산책로의 인위성에 미루어 인생의 근원적 우연성을 성찰해보는 일에는 그 나름의 뜻이 있다. 그것은, 우리네 일상의 세속이 속절없는 우연이라는 사실에 대한 역설적 깨달음이다. 그리고 그 우연이 제도와 관습과 체제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깊이 은폐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우연의 바깥이 없다는 그 사실이 거꾸로 그 우연을 필연처럼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겸허하고 예리한 배움이다.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사원, 그리고 기업과 국가는 모두 한갓 역사의 우연일 뿐이다. 실은, 그 사실을 누구나 알기 때문에 곧 그 사실은 우리의 체질과 공동체의 공기 속에서 깨끗하게 잊혀진다. 우리가 24시간 의도와 결심, 욕망과 보람 속에서 아옹다옹 영위하는 이 자본제적 일상은 내 존재의 흩어짐과 비움을 쉼 없이 유예하고 저지함으로써 그 의사(擬似)-필연성의 신화를 계속하는 것이다. 자연주의자 루소는 도시의 임박한 몰락을 예언하면서 결국 시골이 그 몰락의 문화를 구원해줄 수 있는 처소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도시의 너머에 서정(抒情)의 기억으로 엄존하던 시골은 산업화의 와류 속에 도시 속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시골은 도시 속의 공원으로, 자연의 시뮬라크르로, 상실된 서정의 추억으로 인형처럼 되살아났다. 공원의 존재가 도시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도시라는 체제의 알리바이 속에 포획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아니, 자연과 시골과 공원이 이제 아파트 속으로부터 재생산되는 문화적(文禍的) 도착(倒錯)마저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산(散)책의 그 흩어짐 속에서야, 우리 일상의 흩어지지 않는, 아니 흩어질 수 없는 그 틀은 비로소 낯설게 되새김질된다. 그 산책의 빈터 속에서야 소유와 욕망의 나르시시즘은 어리석고 슬픈 과거처럼 기억되기 시작한다. (jk.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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