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5 | [문화와사람]
좌절과 분노에 맞서 '들'을 지켜온 사람들
빛나는 투쟁사를 간직한 순창군 농민회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3-04-07 15:00:06)
순창군 구림면 오정마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빨치산의 넉넉한 품이 되어 주었던 회문산 자락, 그 들(野)을 지켜온 사람들의 숨가쁘고도 기막힌 사연들을.
잘 벼려진 날처럼 신경을 곧추세우며 한 시대를 온 몸으로 부딪쳐온 순창군 농민회. 구림면 오정마을이 바로 순창군 농민회의 태를 간직한 곳이다.
한때 '악명' 높았던 농민 투사들이 이제는 15년이라는 긴 투쟁의 연륜을 안고, 전체 군민의 8~9할이 넘는 순창 농민들에게 단단한 연대의 끈으로, 삶을 담는 그릇으로 다시 섰다.
"여기로요? 방 한가운데로? 얼마나 컸는데요?"
최형권 회장(44)은 얼마전 여농 회장의 집안으로 굴러 들어왔다던 '바위' 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집터가 좋은께 그나마 사람은 살아 남았재. 이 집터가 예삿집터가 아니랑께." 하마터면 가족들 목숨까지 위험할 뻔 했던 일이었는데도, 심동례 여농 회장(51)은 우스갯소리까지 보태가며 무용담을 늘어 놓는다. 최 회장은 여농 회장이 누구 못지않은 열혈 투사였다고 귀띔해 준다.
한바탕 집안의 '사건사고 일지'를 길게 주고 받은 뒤에야 최 회장이 말문을 연다. "농민회 활동을 해오면서 수없이 갈등하고 고민했지만, 제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는 후회 없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아내를 만나게 됐으니까요."
옆에 있던 부인 오은미씨(여농 총무)와 전 농민회 회장 박재현씨가 마주 보며 빙긋이 웃는다.
농담반 진담반 던진 이야기였지만, 농민회 회원들에게는 사람과의 인연이 삶의 '길'과 같은 의미일 수밖에 없다. 순창군 농민회가 태동하고 본격적인 농민운동의 길이 트인 데에는 사람과의 만남이 가장 큰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86년 최 회장과 박 전 회장을 주축으로 오정리 농민회가 출범하고, 1년 후 비로소 순창군 농민회가 태동하기까지 당시의 '학출'들과의 만남은 더없이 소중한 인연일 수밖에 없다.
"고대와 이대를 졸업하고 순창에 들어온 이선형·박찬숙 부부, 강기종·이태영 목사, 그리고 최 회장은 제 인생에 샘물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들은 내가 농민이라는 사실과 사회를 바로 보는 시각을 심어줬죠. 특히 최 회장과는 의기가 맞아 오정리 농민회를 꾸렸으니까요."
동네에서는 '순둥이'로 불려졌을 만큼 양순했던 박 전 회장을 '농민 투사'로 만들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인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면이나 지서에서 나와 감시를 하는데 겁도 먹고 속도 탔지만, 없는 용기라도 내야지 당하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소 파동 때문에 농민들은 여기저기서 자살을 하고, 마을 전체가 연쇄 도산해 쑥대밭이 됐는데 누가 책임질 거냐고 따졌죠. 마을에선 순한 사람으로 알았는데 다시 봤다고들 했고, 그렇게 해서 다들 용기를 얻은 겁니다."
관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순창군 농민회는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설득하고 교육하면서 농민운동에 있어 큰 획을 그었던 '수세 거부 운동'과 '시청료 거부 운동' '소 몰이 투쟁' '여의도 고추 투쟁' 등을 이끌어 냈다.
"그때만 해도 농민들 교육장에 순찰차가 드나들고 경찰들이 깔리고, 참 살벌한 세상이었죠. 웬만한 각오가 서지 않으면 농민 운동이란건 엄두조차 못내는 시절이었으니까요. 사상이 불순하다, 빨갱이다 몰아부치면서 얼마나 방해를 했었는지, 다 공부하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무장을 했지요."
'군내에 농민회가 생기면 경찰서장 목이 날아간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던 시절이었으니, 탄압과 감시가 오죽했을까.
"87년 대선때 감시가 느슨해질 때를 틈타 면 단위가 제대로 꾸려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구림면을 주 회원으로 군 농민회를 띄운 겁니다. 여기 구림과 오정마을은 순창 농민운동의 못자리인 셈이죠."
특히나 순창은 농민 투쟁이 전남 지역에서부터 위로 확산되느냐, 꺾이느냐의 들목이 됐던 만큼 엄청난 탄압의 대상이었다. 수세 싸움을 벌이는 동안, 물세 납부를 거부했던 각 농가에 TV며 냉장고, 심지어 가축들에게까지 차압딱지가 붙여졌던 일화는 두고 두고 회원들간에 회자되는 이야기다.
"소액 심판이 걸려 모든 회원들이 법원에 출두해야할 상황이었죠. 그때 다들 판사에게 똥세례를 퍼붓자고 결의도 하고 아무튼 대단했는데, 이런 열기를 알았던지 관에서 소 취하를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수세 싸움이 전국으로 번져나가게 된 겁니다."
86년 고추파동 때는 죽창까지 들고 여의도로 집결해 박 전 회장은 여러 검사들이 한 명을 집중 공격하는 '크로스 심문'까지 받아야 했던 적도 있다.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이 전보다 크게 개선된 건 그만큼 투쟁의 대가가 따랐기 때문이죠. 농민들이 패배주의적이고 회의적인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건 이런 투쟁과 승리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 값진 교훈들입니다."
최 회장은 이제, 그 영광과 상처들을 가슴에 새기고 순창군 농민회는 또 다시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도약기를 맞아야 할 때라고 말한다.
"농민회 투쟁의 역사는 국가의 농가 정책이 얼마 만큼 주먹구구식이었고 엉터리였는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런 비판과 투쟁을 뛰어넘어 대안세력으로 성장해야 하는 시기죠. 그러기 위해서는 활동가들의 전문화, 과학화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고요."
지금처럼 농촌의 농가 정책 입안자들이 실정에 맞지 않는 농법을 적용시켜 놓고도 보상은 커녕 공식적 책임자도 없는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하자면, 대안을 내놓을 만한 전문화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국 농민회 전체가 안고 있는 공통의 사안이라면, 순창군 농민회만이 챙겨야 할 또 다른 몫도 있다. 순창 군민의 8~9할이 농민인 현실을 감안할 때, 농민회의 역할은 그만큼 확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농민회 회원들이 아이들에게 풍물을 가르치고, 군정을 감시하는 시민단체로의 역할을 튼실히 해내고 있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다.
농민회와 늘 함께 했던 여농이 농협 제 역할 찾아주기나 회원들의 건강, 복지, 환경, 교육문제 등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농민회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사업에 빛을 더해주는 요소다.
순창군 농민회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것은 회원들이 워낙 '강성'이었던 것도 그렇거니와,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엮어온 투쟁사나 가족사가 적잖이 극적이기 때문이다. 『들(윤정모, 1992)』이라는 농촌 소설이 순창군 농민회 회원들의 투쟁사와 살아온 내력들을 중심으로 쓰여졌을 만큼 이들의 역사는 모질고도 빛나는 것이었다.
회원들은 이제 '과격하고 거칠고 무식한 싸움꾼' 이라는 편견을 너머 그 '한'을 사회에 아름답게 승화해 내는게 앞으로의 그들 몫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