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6 |
좋고 나쁜 것 미리 알 수 없나요?
관리자(2005-06-13 15:37:35)
좋고 나쁜 것 미리 알 수 없나요?
언젠가 시험 삼아 체질감별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네 형질로 몸의 유형을 구분하여 각기 다른 양생법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학에는 무시하기 어려운 흡입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체질감별 자체보다 조건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는 섬세함에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모든 인간의 체질은 모두 다르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요? 이것을 넷으로 나눈 것은 이제마가 주역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학체계를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아이작 뉴튼이 당시 기독교의 숫자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무지개의 색깔을 일곱으로 나눈 것과 유사합니다. 동무가 무지개를 연구했더라면 틀림없이 넷 또는 다섯 색깔로 무지개를 설명했을 것입니다. 체질을 여덟으로 나누지 않은 것은 단순히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과 팔괘 사이의 질적인 차이 때문이라 하는데, 차이를 잘 알지 못하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군요. 아무튼 저는 몇 가지로 나누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나누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질의응답을 하는 시간이 돌아오기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혼자 가만히 있을 때 공연히 끌리는 음식이 몸에 맞는 음식이라 하는데, 옳은 말인가?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몸에 좋은 것을 찾아 오래 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몸에 나쁜 것을 불러들여 목숨을 재촉한다. 우문에 현답이라고 옆에서 놀리더군요. 욕심의 뒤통수를 맞은 셈이지요. 새겨 보니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는다는 동어반복이었습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를 미리 알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세월이 흐르면 아니 세상과 거리를 두게 되면 그때 확실히 알게 되리라는 대답은 사실 ‘흰말은 말이 아니다’는 주장처럼 궤변에 가깝지요. 그렇지만 논리와 직관적 판단이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고려하여 앞의 대답을 다시 살펴보니, 현재 몸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판단의 전제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과거와 견주어 지금 몸의 상태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를 안다면 자신에게 유익한 음식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릴 수 있다는 말은 전문가가 필요 없는 상식적인 발언일 것입니다.
지역 예술의 현 상태에 대하여 비슷한 질문을 던져봅니다.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음식이 필요합니까? 지금까지 별 탈이 없었으니 상차림을 그대로 유지할까요? 몸이 허하니 보약을 한 제 달여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치료부터 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합니까? 먼저 판단의 기준을 정해봅시다. 예술의 조건을 계량화할 수 있지만 수치에 대한 판단이 서로 다른 경우가 드물지 않지요. 게다가 숫자를 불신하는 일부 예술인들은 질적인 수준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양적 팽창이 반드시 질적 향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적 토대의 구축이 반드시 세련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또한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시대의 문화적 수준에 우리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찬란한 문화의 시대가 이미 지나가 버렸다고 믿기에는 아무래도 그 성취가 너무 미진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조급히 이루려 하지 말고 차분히 준비하는 게 상책일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 몸에 맞는 음식이 무엇인지, 무엇이 좋을지 무엇이 나쁠지 모르고 있습니다. 가려서 섭취하고 몸을 만들다 보면 우리 생전에 그날이 올 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건축, 문학, 미술, 사진, 서예, 연극, 영화, 음악, 춤 등의 장르는 지나치게 번잡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분류는 다시 세부 장르로 자잘하게 쪼개집니다. 같은 음악이라 하지만 국악과 양악 사이는 다른 장르만큼이나 멀어 보입니다. 동무는 사람을 하나하나 따로 취급하거나 추상적으로 하나로 보지 아니하고 넷으로 나누어 상태에 맞게 치료했습니다. 사상의학을 적용하여 예술의 종류를 나누는 것은 터무니없는 시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분류법을 한번쯤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강연, 출판, 전시, 공연이라는 분류도 상당한 효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간단하면서도 포괄적인 어떤 분류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지도 모릅니다.
| 정철성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