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5 |
다가산 전주신사2
관리자(2005-05-13 10:32:37)
다가산 전주신사와 친일잔대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누군가 그러더군요. 4월이 잔인한 달이라더니 너무 힘이 들다고. 사람마다 제각기 생각이 있고 나름의 생활들이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 느끼는 것 또한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4월 19일 김성수의 현판이 내려지던 날,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웬 말이 그리도 많은지 갑갑했습니다. 그러더니 28일 조선일보에서 히말라야시다를 자른 것을 놓고 문화재청장을 곱씹어 대는 것을 보면서, 참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숨겨진 반민족 친일의 역사는 알려지고 기억되고 그래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할 것입니다. 불과 60년 전의 일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지 못합니다. 과거의 힘든 기억을 하지 않으려는 것과 무지는 다른 것입니다. 다가산의 전주신사도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오늘은 무지에 갇혀버린 다가산 전주신사의 단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신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지요. 신사는 일본의 가미 즉 신을 모신 곳입니다. 유교·불교·기독교 하듯이 일본에는 신도(神道)가 있지요, 신도란 "일본 민족에 고유한 가미(神) 및 신령에 관련된 신념을 기반으로 발생 전개되어 온 종교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또한 거기에는 이와 같은 가미와 신령에 관련된 신념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종교적 실천 및 널리 생활 속에 전승되어 온 태도나 사고방식까지 함축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사는 이러한 신을 모셔놓은 곳인데, 이중 특히 황실과 관련된 가미(신)을 모셔놓은 곳은 신궁이라 합니다. 전주에는 전주신사가 먼저 생겼고, 1940년대 전북신궁을 건립하려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먼저, 우리는 다가산에 전주신사가 있었던 것을 배웠습니다. 존재 유무의 자체는 출발입니다. 하나씩 조각을 긁어 모음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전주라는 공간의 이해는 넓어질 테니까요. <사진 1>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진은 《전주부사》에 수록되어 있는 전주신사의 사진입니다. <사진 1> 하단에 <사진 1-1>은 4월호에 실린 전주신사의 사진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건물을 찍었으면서 이렇게 모양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주부사》가 1942년에 출간되었으므로 <사진 1>은 1930년대말이나 1940년대 초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진 1-1>은 1931년에 제작된 전주안내도에 실린 사진이므로 <사진 1>보다는 한 10년 정도 앞의 모습입니다. 보통의 경우라고 한다면 신사의 모습은 <사진 1-1>이 대부분입니다. <사진 1>과 같은 형태의 신사는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후에 찍혔을 것으로 보이는 <사진 1>이 10년전(사진 1-1)보다 초라한 모습인 것으로 보아 잘못된 사진일 가능성이 큽니다. 만일 <사진 1-1>이 <사진 1>보다도 시기가 앞선다고 한다면 수긍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건물이 있던 곳에 현재는 호국영렬탑이 세워져 있습니다.(<사진 2>) 그런데 호국영렬탑의 앞에 이는 조그마한 석조물이 눈에 거슬립니다.(<사진 2-1>) 이 석조물은 마치 당간지주처럼 기능에 2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없어진 또 하나의 석조물과 함께 커다란 봉을 세웠을 지주석입니다. 뒷면에는 누군가에 의해 정으로 쪼아진 흔적이 있구요. 아마도 일본천황의 연호를 쪼아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둥의 사용을 사진에서 찾는다면 <사진 3>에 있는 도이리 양쪽에 높게 서있는 깃대와 같은 것을 떠 바치는데 사용했을 것입니다. 누구도 이 돌에 대해 의심한 바가 없으시겠지만, 어떤 눈으로 이것을 보느냐에 따라 의문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석조물의 상단모양 처럼 사각의 뿔각 형태는 우리나라 석조물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일본의 석조물에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전주신사는 1914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존속되었습니다. 신사 완공 후에 신사를 관리 운영하는 조직이 만들어졌고, 신사의 공간에서는 일본천황이나 태후, 황태자 등의 생일 축하행사는 물론 일본제국주의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각종 의례가 열렸습니다. 일제시대 학교를 다니셨던 분들이라면 적어도 전주신사에 가서 요배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수많은 행사가 열렸던 곳은 신사의 신전이 있던 산정상은 물론이고 <사진 4>에 보이는 현재 천양정 앞 광장이었습니다. 웅장(?)했던 석조 도리이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지만 다가공원 내에 있는 나무들은 여전합니다.
친일청산에 대한 생각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4월 한 달 부아가 치민 것은 침묵 뒤에 떠드는 변명과 압력 때문입니다. 최근의 과거사 청산과 친일청산을 메카시즘으로 몰아붙이고 뒤돌아서서 욕하는 것은 진정한 사죄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메카시즘을 떠드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진정한 참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사죄를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친일청산을 업으로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사과하고 뒤로 뒤통수나 치는 고이즈미와 같은 일본의 수구 정치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