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5 |
[김제]덤벙주초와 그랭이질
관리자(2005-05-13 10:19:36)
덤벙주초와 그랭이질(김제의 문화정책에 대한 비관과 방향제시)
글-김영자 두리문화 회장
내 고향 김제를 생각하면 가을바람에 낙엽 쓸리는 소리가 난다. 전주와 같이 쓰고 있는 모악산을 제외하면 이름난 산도 없는 편이고 유장한 물줄기도 흘러가지 않는 곳이다. 인구는 해마다 줄어 시(市)라는 이름을 잃을까 걱정스럽고 선거구는 이미 완주와 통합당해 버렸다. 문화유산 가치가 있는 유형물도 그렇고 인적자원을 생각해도 그렇다.
김제에서 태어나 김제를 떠나본 적이 거의 없는 내가 김제를 사랑하는 것은 김제의 문화유산에서 반해서가 아니다. 너무 열악하여 애잔하기까지 한 고향을 사랑하게 된 것은 대학 때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읽다가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주권을 잃어버린 나라와 애잔한 고향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드넓은 김제의 문화예술에 대해 간단한 고찰을 하려한다. 문화예술이라는 분야가 워낙 방대하고 추상적이기도 해서 글의 전개를 위해 몇 가지 대표적인 분야만 예를 들어 문화적 상황을 살펴보고 방향과 대안을 제시해 보겠다.
김제의 문화적 상황
어느 고장이나 자기 고장이 문화유산의 보고라고 강변을 한다. 그러나 말처럼 현실화된다면 무엇이 아쉽겠는가마는, 말은 항상 추상적이고 실현하기 어려운 원론들을 내세우는데 그쳐버리고 구체적인 대안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문화예술의 진흥은 유형적 자산도 중요하지만 그 자산을 활용하고 운용하는 정도에 좌우된다는 관점에서 현재 김제의 문화적 상황을 짚어본다.
금산사는 개산 1400주년이 넘었다. 유형문화재는 늘 있어온 것이니 그렇다 치고 김제를 대표하는 사찰로서 그 연륜에 걸맞은 문화 인프라나 콘텐츠를 갖추고 있는지 궁금하다. 망해사는 부대 옆에 있어서 삭막한데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절마당을 대나무 울타리로 갈라놓아 차마 다가서지 못하는 절이 되어 버렸다. 어쩌다가 매향비라도 들여다보려면 절을 지키는 분에게 ‘반찬 먹은 강아지’ 취급을 받을 각오는 단단히 해야 한다. ‘한 집 건너 하나’ 라는 교회 안에는 또 어떤 종류의 문화예술이 있는지 궁금하다. 지평선 축제는 우수축제로 지정되어 성공적인 축제라고 자타가 평하지만 넘치는 비쥬얼 속에 철학은 아주 빈곤한 편이다. 언제까지 농경문화를 고집할 것인가? 백번 양보해서 고집한다고 해도 농경문화라는 향수에 의존해서 살아남아야 하는가? 또, 행사의 주체가 관연 김제시민들인가? 심포항도 날이 갈수록 찾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대중적인 가격과 질 높은 서비스는 어디에 두었는가?
김제시의 문화예술정책은 있는 것인가? 실력이 부족하여 다 살피지 못했는지 몰라도 시민의 혈세를 마음에 맞는 대로 분배하는 일 말고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김제시의 문화예술단체에 지원금을 나누는가?
문화예술인들은 과연 왜 자기가 문화예술인이라고 생각하는가? 개인이거나 혹은 단체거나 간에 시민들과 함께 향유할 수 있는 문화 컨텐츠를 가지고 이를 실행하려 노력해 보았는가?
문화정책의 방향과 대안제시
주 5일제 근무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의 여유 시간이 많아졌다. 주말을 잘 보내는 것이 성공실패를 좌우할 수도 있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주말에 방치되는 사람들, 또 누군가 장(場)을 열어주지 않으면 속수무책인 사람들을 위해 금산사와 망해사를 비롯한 사찰은 주말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행해야 한다. 교회도 주말에 사람들이 모여 함께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문화예술 컨텐츠를 만들어 실행해야 한다. 종교기관이 지역문화예술에 앞장서야하는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에 대한 의무요 시민들에 대한 봉사이기도 하고 신도를 늘리는 방안도 된다.
지평선 축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물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비교적 성공한 축제다. 그러나 사람이 몇 명 다녀갔는가 보다는 시민들이 얼마나 즐겁고 유익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또 농경문화를 도시적인 젊은 세대들에게 어떻게 전수하고 향유하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김제시의 문화예술 정책도 마찬가지다. 문화예술에 대한 정책을 세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개성이 강한 문화예술인들을 움직여 그 기획을 실행하는 일도 참 힘들 것이다. 그러나 김제시의 문화예술정책은 문화창조보다는 문화해독에 힘을 쓰는 정책이어야 한다. 많은 예술단체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들을 실행하게 하고 그것이 문화예술단체를 평가하는 주안점이 되어야 한다. 예산이 닿는 한 더 많은 시민강좌를 열도록 지원해야 하며 지원한 사업에 대한 타당성과 적합성을 검토해 낼 줄 알아야 한다.
문화예술을 담당하는 공무원만큼은 자주 바꾸지 말고 평생을 지역문화예술을 위해 일할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예 문화예술분야의 공무원을 따로 채용했으면 좋겠다. 특히 소도시에서의 문화예술정책은 돈을 분배하는 정책(?)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문화해독능력 즉, 문화를 읽어내는 힘과 건강한 비판으로 재창조시키는 힘을 키워주는 정책을 세울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또, 문화예술을 창조하고 제공하는 사람들은 시스템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문화예술을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문화세포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문화란 무엇인가? 물론 유형의 자산들도 있지만 그것을 제공하기도 하고 향유하기도 하는 인적자원이 더욱더 중요하다. 문화예술인 자신이 바로 지역문화예술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아울러 자기 지역의 문화예술에 대한 통시적 고찰과 함께 일반인들과 공유가 가능한 문화예술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개인적인 전시나 문화예술인들끼리의 행사 정도가 지금 김제문화예술의 현 주소다. 이런 전시나 활동을 보는 시민들은 문화예술에 가까워지기보다는 거리감을 느낀다고 한다. 문화예술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어려워하거나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끼리끼리의 문화예술은 바람직하지 않다.
바람직한 서예문화
김제는 예로부터 서예의 중심고장이다. 송일중 선생과 이정직 선생을 이은 강암 송성용 선생의 서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람한 줄기다. 우리나라의 한 지역에서 문화예술 한 분야를 가지고 300년 전(展)을 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얼마 전에 열었던 ‘서예300년 전’은 김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산민 이용 선생을 비롯한 여러 명의 김제출신 서예가들이 우리나라 서단의 우뚝한 봉우리다. 그런 서예의 맥을 김제문화원의 사단법인 한국서예문화연구회에서 이어가고 있다. 이 단체에서는 문화예술의 계승과 재창조에 대해 한 수 배울 수 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서예강좌를 열어 조상의 숨결과 서맥을 함께 향유하고 재창조 한다. 각종 서예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은 덤이다. 앞으로 김제 서예의 전망은 밝다. 매머드급의 대회나 행사를 요란하게 내놓지 않고 살뜰하게 문화예술을 가꾸고 누릴 줄 아는 단체다.
얼마 전 안동에 다녀왔다. 관광을 하면서 제일 감동 받은 부분은 날렵한 지붕 선도 아니고 화려한 경관도 아니었다. 돌에 정을 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용한 덤벙주초와 그 돌의 생김새를 따라 나무를 깎는 그랭이질로 기둥을 세운 이름 모를 목수의 솜씨였다.
문화예술 활동을 하기 어려운 지역 환경을 탓하지 않고 좋은 작품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과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수준을 탓하지 않고 그들에게 시선을 맞추어 함께 하는 사람들과 효과적인 문화예술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직접 현장의 소리를 듣는 공무원이 장차 김제의 문화예술을 지탱하는 힘이 될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