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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5 |
[김제]한번 찾으면 한없이 머무르고 싶은 고장
관리자(2005-05-13 10:17:31)
한번 찾으면 한없이 머무르고 싶은 고장 -김병학 전 김제문화원장 전 화를 하거나 필자를 찾아와서 김제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왜 김제라 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김제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김제지방에서 금(金)이 많이 나와서 김제(金堤)라 했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김만경(金萬頃)벌판에 벼가 누렇게 익어 황금의 물결을 이루어서 김제라 했다는 설이다. 김제는 도작문화의 발상지요 우리나라 제 1의 곡창인 호남평야의 중심지다. 김제는 선사시대부터 삶의 터전이었다. 1975년 벽골제 경장거 수문지 발굴 조사 시에 제방밑 부분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인 유구석부가 발견되었다. 김제가 선사시대부터 농경지였다는 증거다. 동으로 모악산을 끼고 서해에 연해 있는 금만평야에서는 역사가 있기 이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농사를 지어왔다. 금만평야의 젖줄인 모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김제만경을 적시고 서해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에 한해와 수해가 없는 곳이 김제이다. 동진강과 만경강을 끼고 서해바다까지 닿아있는 김제만경에 일망무제하게 펼쳐진 외배미들(한필지)벌판에 자리한 김제는 삼한시대에는 <벽비리국>, 벽제시대에는 <벽골군>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김제라는 이름을 갖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김제는 한마디로 쌀의 고장이다. 기름지고 밥맛이 좋은 쌀을 생산하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물이다. 그래서 슬기로운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벽골제를 만들어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었다. <동국여지승람>,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 된 제일 큰 저수지인 벽골제(사적111호)를 쌓았다고 하는데 둑의 길이가 무려 3.3km이고, 몽리 면적이 9.840결(結, 약1만ha)이며, 수문이 5개가 있어 김제만경평야는 말 할 것도 없고 고부군(현 정주시)과 부령현(현 부안)과 인의현(현 태인)에까지 벼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했다고 적혀 있어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뒤 왜인들이 동진농지개량조합의 수로를 만들면서 둑의 가운데를 잘라서 둘로 갈라놓았고 수문 3개는 없어졌지만, <장상거>와 <경장거> 두 수문의 돌기둥은 1700여년이 지났는데도 고색창연하고 자태의연하게 남아있다. 우리 선조들의 유적은 김제인의 가슴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 또한 김제하면 사금(砂金)을 빼 놓을 수 없다. 김제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 김제는 금의 둑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일제 때 왜인들이 사금채취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김제에서 채취한 사금이 전국 금 채취량의 30%를 차지했다고 하며, 광복 후 최근까지도 김제에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사금을 채취하는 곳이 많았다. 또한 김제는 호남야산개발사업을 들 수 있다. 야산개발사업지구 내에 3000정보(ha)의 뽕나무를 심어 김제 누에고치가 전국에서 제일 많이 생산되어 잠업소득으로 군민들에게 많은 농가 소득을 안겨 주었다. 김제의 야산개발 덕분에 지금도 산 능선에까지 섬진제의 물이 흐르고 있어 농작물 재배는 물론이고 토지 이용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김제는 들도 넓고 인심 또한 넉넉한 곳이기도 하다. <동국여지승람> “풍속조”에 인심순후 근어가색(人心醇厚 勤於稼穡)이란 구절이 있다. 즉 김제사람은 인심이 순후하며 농사일에 부지런하였다고 적고 있다. 김제는 학계, 예술계, 종교계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된 고장이다. 학계로는 『연석산방미정문고』 등 30여권의 저서가 전부 <지방유형문화재 149호>로 지정된 석정 이정직(李定稷)을 들 수 있다. 예술계로는 서예의 대가인 송일중(宋日中) 선생과 강암 송성용(宋成鏞) 선생, 한국화의 대가인 벽천 나상목(羅相沐) 선생을 들 수 있다. 종교계로는 금산사 미륵전을 창건한 진표율사, 그리고 생불(生佛)로 일컬어지고 있는 진묵 대사와 최근 학승(學僧)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탄허 스님을 들 수 있다. 정계 인물로는 3.1운동을 주도했던 49인중의 한사람이며 3대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咸台永)과 독립운동가이고 실학자인 이기(李沂) 선생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김제는 쌀의 고장, 문화·예술의 고장, 인물의 고장, 사금의 고장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김제는 관광명소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다.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던 곳이 금산사다. 모악산 자락에 자리한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으로 호남 4경중의 하나이다. 봄의 경치로 금산사의 벚꽃을 뽑는다. 그리고 금산사의 <미륵전>은 밖에서 보면 3층 건물이지만 안에서 보면 층의 구별 없이 통층으로 된 건물로 국보62호로 국내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건물이며, 사찰주위에는 보물 11점 등 많은 문화재가 산재하고 있어 사시사철 관광객이 줄을 잇는다. 다음은 번영로 벚꽃길이다. 벚꽃길 하면 누가 보아도 전주 군산간 번영로(백리 벚꽃길)하고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비치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3월,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면 번영로 1백리 벚꽃터널은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어우러져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리고 누가 뭐라해도 국내 최고최대를 자랑하는 벽골제이다. 백제 비루왕 27년(서기330년)에 쌓았다는 벽골제는 그 때 세워졌던 수문 석주가 1700여년이나 지났는데도 고색창연하게 남아있어서 우리선조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고 있고, 옛 선조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사용했던 유물을 모아 “수리민속유물전시관”을 만들어 놓아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에게 좋은 볼거리가 되어 1700여년전에 쌓았다는 둑과 수문석주와 수리민속유물전시관 유물을 보기위해 학생들과 일반관광객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찾아오고 있다. 다음은 서해 바다와 가장 바짝 붙어 있다는 망해사다. 망해사는 사찰로서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관광명승지로 천혜의 경승을 이룬 곳이다. 망해사를 정점으로 심포 어항 등 서해연안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서해의 낙조가 보는 이의 넋을 빼게 한다. 시인 고산(古山) 윤선도가 망해사를 찾아 절경에 감탄하여 읊은 시가 있다. 이 시 한 수만 하더라도 망해사의 절경을 짐작케 한다. 또한 심포에 위치한 어항에 저녁노을이 일 때에 갈매기 날아들고 범선들의 만선 귀항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간만의 차가 심한 이 곳 서해의 만경강은 썰물이 동남으로 전개되어 금만경 외배들처럼 광야를 이루어 조개(백합)의 보고로도 유명하다. 망해사를 중심으로 한 이곳은 멀리 고군산열도까지도 내다 볼 수 있는 곳으로 명승지이자 유적지이며 군사적 요새지로서 이 지역을 한번 찾아온 사람들이면 한없이 머무르다 가고 싶어 한다. 이와 같이 어느 곳에 내 놓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 자랑스런 고장이 바로 김제이다. 김병학 | 1930년 김제에서 태어났다. 김제문화원장과 전북문화원장을 지냈고, 서울신문사제정 제13회 향토문화대상과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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