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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5 |
[산성]전봉준도 피신했던'입암산성'
관리자(2005-05-13 10:14:59)
전봉준도 피신했던'입암산성' -정읍문화원 입암산성은 전라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갈재(蘆嶺)로부터 동쪽으로 약 4㎞지점에 위치한 입암산(654.8m)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계곡을 감싸 안은 가늘고 긴 포곡식 산성이며, 천연의 요새이다.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에 「입암산석성 주위 2,920보(笠岩山石城 周圍 二千九百二十步), 내유계수 동하석갈(內有溪水 冬夏石渴)」이라는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고부고적조(古阜古蹟條)에는 「입암산고성(입암산고성) 석축주 12,028척(石築周 一萬二千二十八尺) 사고중관(四高中寬), 내유일계(內有一溪)」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종(太宗) 10년(1410)조에 도고(度高), 전라, 충주의 요지산성(要地山城)을 수축케 하였는데, 그중에는 남원 교룡산성(南原 蛟龍山城), 담양 금성산성(潭陽 金星山城), 정읍 입암산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산성의 지세가 마조(馬槽, 말구유)와 같고 성중(城中)이 감추어져 있으나 성위에 가면 시계가 트여 있어 갈재의 관문을 막을 수 있는 요충이다. 이 산성은 주로 북방의 정읍, 태인 등 4읍을 속읍으로 하였지만 강욕(姜浴)은 일단 유사시 거민들과 너무 떨어져 있어 효용가치가 적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11월 9일 공주 우금치(牛金峙)싸움에서 관군에게 참패한 전봉준(全琫準) 선생이 같은 달 27일 태인 싸움에서도 패하자 승산이 없음을 판단하고 농민군을 해산한 뒤 수종 몇 사람만을 데리고 입암산성으로 피신했다. 다시 백양사를 거쳐 순창 피노리로 갔다가 관군에게 피체되어 서울로 압송돼 이듬해 봄에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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