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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5 |
[산성]태조영정을 피신시키기위해 쌓은,위봉산성'
관리자(2005-05-13 10:12:41)
태조영정을 피신시키기위해 쌓은,위봉산성' -완주문화원 완주는 전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으며, 외적이 들어올 때 방어가 필수적인 지리적 위치에 있다. 운봉과 남원을 거쳐 전주로 입성하는 길목에 남관진과 남고산성을 두어 철저한 방어를 하였고, 동쪽에는 위봉산성을 두어 항상 전시를 대비한 만반의 준비를 도모하였다. 남고산성은 남고진을 주축으로 크게는 현재 상관초교에 위치한 남관진까지 미쳤다. 남관진에는 만마관이라는 관문이 있는 2층집 누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 편액을 남고진사적비를 쓴 이삼만이 썼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고 산성의 흔적만 남아있다. 남관진창건비가 상관초교 맞은편에 있는데, 관찰사였던 이상황(1763-1841, 호는 동어 또는 현포)과 박륜수가 전라도 관찰사로 와서 남관진에 진장을 설치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61년이 지난 후 낙재 이호준이 본도 관찰사로 부임한지 4년 만에 이를 임금에게 보고하고 대원군의 명으로 진을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관진의 규모는 각종 진장아문, 창고, 장대, 화포청 등 100여 칸의 건물이 있었고 역사적으로 왜구를 무찌르기에 적합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었지만 지역주민의 애환이 서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또 전주를 방어하는 중요한 산성이 있었는데 그것은 위봉사가 있는 위봉산성이다. 위봉산성에 대해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는 “전주동방 40리에 있는데 석축으로 둘레는 5천97파(把)이고 여첩(女堞)은 2천437이요 성 안에는 45개의 우물이 있으며 물웅덩이는 9개소, 소금산은 1개소가 있다. 숙종(肅宗) 원년(1675)에 쌓았다.”고 하였다. 숙종대에 이곳에 산성을 새로 쌓은 것은 임진·정유년의 선조국란과 인조대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을 통하여 전주에 있는 경기전 영정 및 왕조실록을 묘향산까지 피난시켰고,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설치한 사고(史庫)도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전주에 가까운 곳에 험한 지형을 골라 새로이 성을 쌓아 유사시에 태조 영정을 피난시킬 수 있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 성내에 행궁(行宮)을 세웠는데 「완산지(完山誌)」에 행궁은 영정이산소(影幀移安所)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 위봉산성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갑오동학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했을 때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전주 부성을 방어하는 책임은 저버리고 경기전 영정과 조경묘위판을 피난시킨다는 핑계로 받들고 와서 승려에게 맡겨놓고 공주로 도망친 일이 있었다. 이같이 이 산성을 태조 영정을 피난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전주로 통하는 서문은 3칸의 홍예문이며, 그 위로 문루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문루의 지붕은 팔작지붕의 형태를 하였다고 한다. 현재 성문의 밖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반원형의 편문식 옹성이 복원되어 있으며 또 석축으로 만든 무지개문(홍예문)이 남아 있다. 무지개문 바로 밑에는 문을 달아 열고 닫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문지석과 문지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짝은 2짝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위봉산성은 딸각딸각 소리를 들으며 여유롭게 산책을 할 수 있는 장소이며 사시사철 다양한 꽃나무와 산새소리가 울려퍼지는 곳이다. 조금 더 가면 고찰인 위봉사와 명창 권삼득이 득음했다던 위봉폭포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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