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5 |
[산성] 조선실록 보관했던 '적상산성'
관리자(2005-05-13 10:11:43)
조선실록 보관했던 '적상산성'
-무주문화원
적상산성은 무주군 적상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창리, 포내리, 괴목리, 사천리 등 4개 리에 걸쳐 있는 적상산 위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는 절벽을 이용해서 석성을 쌓은 대표적인 산성이다.
적상산성의 축성시기에 관해서는 고려말 또는 조선초기로 정리되어 왔다. 그것은 고려말 최영(崔塋)의 축성 건의와 조선초 성곽정리 등에서 연유된다. 그러나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승람』 등의 옛 문헌에 따르면, 최소한 고려중엽 거란의 제 2차 침입(1010년) 이전에 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나아가 시대적 정황과 축성방식 등을 볼 때 백제에서 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 멸망 후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까지 방치되었으나, 고려중기 이후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 따라 인근의 여러 고을 백성이 이곳에 의지하여 보전하였던 것이다.
차츰 잊혀져가던 적상산성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방어의 중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 광해군 때 북방의 후금이 강성해짐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의 보존문제가 논의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즉, 묘향산에 보관 중이던 『실록』과 『선원록』의 보다 안전한 보관을 위해 새로운 장소가 물색 되었는데, 적지로 적상산성이 거론된 것이다. 이에 따라 광해군 6년(1614), 적상산성 안에 실록각이 창건되었고, 광해군 10년(1618)에는 새로 편찬된 선조실록이 처음으로 봉안되었다. 따라서 산성의 수비를 위한 기구가 생겼고, 그에 따른 후속조치 등이 이루어졌다.
그 뒤 1632년(인조 10)까지 시행된 후속조치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 바로 『무주현적상산성조진성책(茂朱縣赤裳山城條陳成冊)』이다. 인조 10년(1632) 무주현감 김수창(金壽昌)이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진성책』은 산성의 규모와 4대문 현황, 성내 사방도리, 가사완파형지, 군량비축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인조 12년(1634) 묘향산에 보관 중이던 실록이 이안(移安)되었다. 그런데 1636년(인조 14) 발발한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인해 사고를 비롯한 산성의 방어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고, 3년 후인 1639년(인조 17) 비변사(備邊司)에서 무주를 비롯한 인근 7읍을 적상산성에 영속시켜 산성을 수축할 것과 각성(覺性)대사를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성중에 상주시킬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
이처럼 산성 수축과 정비 등을 마친 뒤, 1641년(인조 19) 사각 옆에 선원각(璿源閣)을 건립하고,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함으로써 명실공히 사고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645년(인조 23) 승병들의 숙소 문제로 호국사(護國寺)가 창건되었고, 1674년(현종 15)에는 무주현이 무주도호부(茂朱都護府)로 승격되면서 현감이 도호부사겸수성장(都護府使兼守城將)으로 위상이 높아졌으며, 1703년(숙종 29)에는 토포사(討捕使)까지 겸임하게 되어 실질적인 독진관(獨鎭管)이 되었다.
이처럼 적상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에 축성되어 한 때 방치되기도 하였으나, 고려 시대에는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인근 백성의 피난처가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을 지키는 요지가 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사고가 폐지되고,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1965년에 사적 제146호로 지정된 적상산성은 전장 8.143m(214,976㎡)의 규모이다. 현재 성벽 일부의 보존과 함께 유지가 남아 있으며 적상산성 안에는 안국사가 이건되어 있고, 사고가 복원되었으며, 양수발전소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