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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5 |
[산성]갑오농민전쟁의 합성 간직한'교룡산성'
관리자(2005-05-13 10:09:49)
갑오농민전쟁의 합성 간직한'교룡산성' -남원문화원 남원지역에 남아 있는 30여 개 산성 중에서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교룡산성은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을 에워싼 것으로 둘레는 3.1km 가량에 이른다. 교룡산 정상과 동쪽으로 형성된 계곡을 두른 포곡식 산성이다. 그곳에 성을 처음 쌓은 내력은 분명치 않으나, 그 터와 형식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는 금산사에서 온 승병대장 처영(處英)이 고쳐 쌓았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성안에는 우물이 99개나 있었고 밀덕봉과 봉덕봉 등 산세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유사시 인근 주민이 대피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지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성의 관군과 백성은 모두 교룡산성으로 옮겨 일대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원군으로 와 있던 명나라 장수 양원이 이러한 사정을 잘 모르고 평지인 남원성에서 싸우기를 고집하여 교룡산성을 버리고 나왔다가 남원성에서 참패를 당했다. 성벽은 자연석이 아닌 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았으며, 성벽 귀퉁이에서 성안으로 통하는 무지개형의 출입문(홍예문)이 있다. 홍예문을 들어서면 길 오른쪽에는 교룡산성을 지켰던 역대 무관 별장들의 기적비(紀績碑)들이 있어 교룡산성의 역사를 이야기해준다. 산성에는 옛 용천사(龍泉寺)였던 호국사찰 선국사와 동학(東學) 창시자 최제우가 은거했던 은적암 터가 있다. 특히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이곳에 머물면서 동경대전의 내용을 집필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사상을 동학이라 이름한 사적(史蹟)이기도 하다. 그 후 1895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의 지도자인 김개남(金開南, 1853~1895)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이 교룡산성을 거점으로 활약했다. 우리 고장 주생면 출신인 조선시대 문학자 양성지(梁誠之)는 ‘교룡산성에 올라’ 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교룡산성에 올라 보니 남원고을은 호남 산수간에 있고 외로운 성 우뚝우뚝 길을 돌아 자리하니 대방으로부터 남경의 땅이 되어 만방을 제압하던 요충지로다 登南原蛟龍山城 邑在湖南山水間 孤城屹屹路回盤 帶方自是雄藩地 控抱猶能制人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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