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5 |
[산성]전쟁의 흔적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땅
관리자(2005-05-13 10:07:26)
전쟁의 흔적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땅 - 최정학 기자
일기예보는 올봄 들어 최악의 황사가 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간밤의 비바람에 씻긴 남고산성의 아침은 맑고 깨끗했다. 지난 4월 20일 남고산성을 찾았다. 전주교육대를 끼고 돌아 제법 거친 언덕을 올라 간지 채 5분쯤 지났을까, ‘충경사’라고 씌어진 팻말이 보이더니, 바로 그 위로 깨끗하게 정돈된 석성(石城)이 보였다. 남고산성이었다.
남고산성은 전주 남동쪽에 위치한 고덕산과 줄기를 맞대고 있는 남고산에 쌓은 석성이다. 평상시에는 무기와 식량 등을 비축해 두고 있다가, 적이 침입해 오면 전주부성내의 모든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해서 응전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남고산성의 유래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서고대학연구소 전영래 소장은 “고려시대 말에 전주부성을 쌓으면서 적의 침입에 대비해 함께 쌓은 성”이라고 설명하면서도 그 이전부터 이곳에 ‘성’이 존재해왔으리라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남고산성은 전주에서 남원과 순창 쪽으로 향하는 남동 방면의 유일한 통로였던 ‘좁은 목’을 훤히 내려다보는 동시에 전주 전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천혜의 군사 요충지를 견훤이라는 탁월한 전략가가 가만두었을 리도 없다.
눈앞에 보이는 남고산성을 뒤로 하고, 일단 산성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남고산성 답사를 도와줄 최서일 씨와 만나기 위해서였다. 원래 충남 논산 출신인 그는 직업적으로 산성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산성 전문가다. 산성이 좋아 우리나라에 안 가 본 산성이 없다고 한다. 15년 전부터 전주에 살면서 남고산성을 수시로 드나들던 터에 지난해 말 우연히 산성마을에 집을 하나 얻었다. 그는 지난 밤 비바람에 엉망이 돼버린 집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 마을은 평시에 식량이나 무기 등을 비축해 놓던 창고가 있던 곳이에요. 몇 년 전까진 그래도 제법 많은 가구들이 모여 살았었는데, 전주시에서 이곳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떠난 사람들이 많아요. 지금은 한 열 다섯 가구 정도가 남아있죠. 산성 안에 마을이 있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인데, 이곳엔 오래전부터 아주 큰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천천히 둘러보니 마을은 온통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시원한 아침바람이 불때마다 이리저리 서걱거리는 대나무 소리를 들으며 차를 한잔 마신 다음 본격적인 답사가 시작되었다.
첫 출발지는 산성마을에 올라가면서 보았던 충경사였다. 그곳에서 천경대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방향을 잡으면 도시를 등지면서 산을 오르게 되지만, 반대 방향으로 오르면 도시를 마주 하게 된다는 최 씨의 설명이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라면 도시의 지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터, 도시를 마주하면서 길을 걷는다면 무슨 맛이 나겠는가.
천경대로 오르는 길은 새로 정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한 돌들이 오르기 편하게 층층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오래된 산성을 오른다는 운치는 별로 돋아나지 않았다. 답사 전에 사전조사를 위해 만났던 전영래 박사의 ‘개탄’이 떠올랐다.
“복원한다고 하면서, 본래 산성의 형태를 다 버려놨어요. 남고산성은 원래 바위 사이사이에 교묘하게 돌을 쌓아서 만든 성입니다. 그런데 복원을 하면서 원형은 고려하지 않고 폭 4m짜리 ‘고속도로’를 만들어 버렸어요.”
새로 쌓은 산성 밑으로 본래 남고산성을 이루던 이끼 낀 돌들이 곳곳에 쌓여있었다.
산성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급경사가 나왔다. 산성 곳곳에 이가 빠진 듯 비어 있는 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돌들은 발을 내딛자 흔들거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올라왔던 곳을 내려다보자 아찔한 현기증이 돋았다.
“이곳에 오는 분들 중에는 꼭 돌을 흔들어보고, 그러다가 빠지면 저 아래로 굴리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분들께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돌들이 빠지다보면 결국 산성도 무너지는거 아니겠습니까. 꾸준한 보수도 꼭 필요하구요.”
천경대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곳에서 맞은편에 보이는 만경대와 그 아래로 줄기처럼 흐르는 남고산성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을 때였다. 최 씨가 손가락으로 고사목을 가리켰다. 보기 흔한 고사목이었다. 제법 오래됐는지 줄기는 이미 다 떨어져 나가고 앙상한 몸통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최 씨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고사목 위쪽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오색딱따구리의 집이라고 했다.
“이따 해가 질 때쯤이면 저 놈들이 집에 들어올 겁니다.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남고산성 안에는 아직도 고라니며 온갖 종류의 동식물들이 살고 있어요. 아마 도시 바로 지척에 이렇게 자연이 고스란히 보존된 지역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겁니다.”
최 씨의 말을 듣고 보니, 그제야 산위의 봄이 눈에 들어왔다. 전주시내의 벚꽃은 이미 다 떨어졌지만 이곳의 산벚은 아직 만개해 있고, 그 밑으로는 진달래가 만발해 있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온갖 나무들이 앞 다투어 봄을 노래하고 있었다.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쌓은 남고산성이 원시의 자연을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최 씨는 그것을 ‘아픈 전쟁의 흔적과 자연의 평화로운 공존’이라고 말했다.
천경대의 바람은 시원했다. 해가 솟아오르면서 점점 짙어지는 황사에 누렇게 둘러싸인 전주시내가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천경대에서부터는 길이 한결 수월했다. 산성이라기보다는 그냥 숲속에 난 한적한 오솔길에 가까웠다.
산성터를 따라 걷는데 곳곳에 군인들이 파놓은 참호가 보였다. 지금은 쓰지 않은지 참호 안에서 풀들이 함부로 새싹을 틔어내고 있었다. 예비군들이 파놓은 것이라고 최 씨는 설명했다. 참호에서는 산 아랫줄기가 한눈에 조망되었다. 누구라도 참호로부터 감시하는 눈길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몇 백 년 전의 군사적 요충지는 지금도 여전히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걸어가자 대포가 있던 자리라는 북포루대가 나왔다. 북포루대에 서보니 고덕산과 남원으로 향하는 길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천혜의 요새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장소였다.
북포루대부터 펼쳐진 길은 조금 어수선했다. 보수공사를 이제 막 끝냈는지 풀 한포기 나지 않은 길섶의 흙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산성 바깥쪽에 설치해 놓은 나무 사다리가 눈에 띄었다. 들짐승들이 남고산성에 의해 단절된 길을 다닐 수 있도록 설치해 놓은 사다리라고 했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왔을 때쯤 억경대에 도착했다. 원래 대포를 거취해 놓던 곳이던 억경대는 남고산성에 있는 천경대·만경대·억경대 세 개의 봉우리 중 가장 높다. 천개의 경치가 보인다는 천경대와는 또 다른 운치가 돌았다. 최 씨는 억경대에서 꼭 한번 일몰을 보라고 권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장관이라는 설명이었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만경대 였다. 만경대에 오르자 맞은 편으로 보이는 천경대가 답사의 끝을 말해주고 있었다. 만경대는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에 얽힌 설화로 더 유명한 곳이다. 왜구를 무찌른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에서 전승 기념으로 큰 잔치를 베풀 때, 조선 개국의 뜻을 내비쳤다고 한다. 이 자리에 있던 정몽주가 말을 달려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당시 서울인 개경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정몽주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생각하며 지은 시는 지금도 만경대 바위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충경사에서 천경대로 방향을 잡아 북포루대와 억경대 만경대를 거쳐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기까지 거리는 2950m, 시간은 약 2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었다. 발길 멈추는 곳 마다 이어진 최 씨의 설명이 아니었다면, 시간은 훨씬 줄었을 것이다.
최 씨 집에 도착했을 때 최 씨의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여 푸짐한 점심상을 차리고 있었다. 가끔 있는 자리라지만 운이 좋아 날짜를 맞춘 것이다. 점심상은 방금 막 따 온 듯한 대나무 순이며 달래 나물 등으로 푸짐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마을 사람과 외지인의 경계가 사라지고 산성 안과 밖의 경계도 사라져, 마치 오랜 친구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옛 전쟁의 흔적 남고산성은 그렇게 원시의 자연과 함께 우리네 푸짐한 인심도 오롯이 간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