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5 |
[산성]역사성과 지역성을 담고 있는 전북의 산성
관리자(2005-05-13 10:06:26)
역사성과 지역성을 담고 있는 전북의 산성 - 곽장근 군산대 교수
성곽이란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흙이나 돌로 구축한 방어시설로 내성과 외성을 모두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성’은 내성만을 의미하고 ‘성곽’은 내·외성을 통칭하는 용어이지만, 서로 유사한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일부러 구분하지 않고 성(城)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하려고 한다. 성은 다시 축성재료, 거주주체, 지형 등의 기준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 부른다. 그리고 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성은 지형을 둘러싼 성벽의 모양에 따라 테뫼식(山頂式)과 포곡식(包谷式)으로 세분된다. 우리나라 성의 기원은, 대체로 기원전 1~2세기 경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집단 취락지에 설치한 방어시설인 둑이나 환호(環濠)에서 비롯되었는데, 4세기 경부터는 정복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산성으로 발전하였다.
전북지역은 성의 분포양상에서 동부 산간지대와 서부 평야지대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남원시를 비롯한 동부 산간지대에는 백두대간과 금남정맥,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에 돌로 쌓은 산성이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교통의 요충지와 행정치소(行政治所)에서 토성의 존재가 일부 확인되었다. 그러나 평야지대는 행정치소마다 대부분 축성된 읍성이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조망권이 매우 뛰어난 곳을 중심으로 상당수의 토성도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처럼 성의 분포양상이 지역별로 큰 편차를 보인 것은 이들 성의 기능과 역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강한 역사성과 지역성을 담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토성과 산성을 중심으로 그 기능과 역할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진안 와정토성
진안 용담댐 본댐에서 위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 와정마을 남서쪽 산에 와정토성(臥停土城)이 있다. 금강과 바로 인접된 반월형 산 정상부에 토성이 입지를 두었는데, 여기에 토성이 자리한 사실은 1994년에 밝혀졌다. 그해 설문조사 때, “이 산에 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아직까지 성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와정마을 주민들이 제보해 주었다. 주민들의 증언과 지표조사 때 발견된 몇 점의 토기조각을 근거로 1997년 군산대와 전북대 박물관 주관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산의 외곽에서 판축법으로 성벽을 쌓아올리고 목책을 두른 백제토성과 그 내부에서는 집자리와 대형 저장구덩이가 조사되었다.
이 토성의 서쪽에서는 흙을 일정한 깊이로 파낸 다음 그 안에 생활공간이 마련된 백제계 구덩식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이들 집자리의 북벽 혹은 북서벽에는 겨울철에 추위를 피하기 위한 구들시설을 갖춰 놓았다. 구들시설은 ━자형·L자형·다곬형 등 모든 유형이 망라되어, 이들 집자리가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성되었음을 암시해 주었다. 그리고 백제의 중앙세력과 직접 관련된 백제토기가 유물의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여기에 소량의 가야토기도 섞여있었다. 토기류의 조합상에 의하면, 진안 와정토성을 경유하는 내륙 교통로를 이용하여 백제와 가야세력과의 사이에 긴밀한 교류관계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해 주었다. 그리고 금강 상류지역으로 백제의 진출시기와 그 경로를 밝히는데 값진 고고학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합미성’으로 널리 알려진 산성들
백두대간과 금남정맥의 험준한 산줄기에 적지 않은 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산성은 대체로 산줄기의 고봉들 사이 말안장처럼 잘록하게 들어간 안부(鞍部)에 자리한 육십령과 복성이재 등 중요한 고개들 주변에만 입지를 두어 그 위치상으로 강한 공통성을 보였다. 그리고 ‘병사들의 군량미를 이들 산성에 저장하였다’는 구전(口傳)에 따라 ‘합미성(合米城)’이라고도 부른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아막성’으로 비정된 남원 성리 합미성을 제외하면, 이들 산성은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산의 정상부를 거의 수평되게 한바퀴 돌린 테뫼식으로 그 규모가 비교적 작다. 지형상 매우 취약한 고개의 주변에만 그 입지를 두어 행정적인 측면보다 오히려 군사적인 방어 시설물로써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한편으로, 전북을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섬진강 수계권으로 갈라놓은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에 위치한 장수 대성리 합미성이 큰 관심을 끈다. 물의 운명을 갈라놓는 ‘분수령(分水嶺)’과 함께 금남호남정맥의 최대 관문인 ‘자고개(尺峙)’에서 북쪽으로 2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자고개는 전남지역을 비롯하여 임실군과 순창군 일원에서 장수읍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했던 중요한 고개이다. 이처럼 대성리 합미성은 교통상 혹은 전략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산성의 동쪽 기슭 중단부에 ‘왕바위’라 불리는 큰 바위가 있다. 이곳까지 행차한 왕이 바위에 올라 잠시 쉬었다고 해서 구전으로 ‘왕바위’라고 전해진다. 그런데 어느 나라 왕이, 언제, 무슨 목적으로 여기까지 행차했는지를 상세하게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이 산성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뜻 깊은 의미를 제공해 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가 하면, 금남호남정맥에 우뚝 솟은 장안산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장수분지와 장계분지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의 끝자락에 금강 상류지역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장수 침령산성(砧嶺山城)이 있다. 장수 대성리 합미성과 함께 대표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두 가지 점에서 서로 긴밀한 공통성을 담고 있다. 하나는 봉분의 직경이 20m 내외 되는 가야계 대형고분(高塚)이 이들 산성 주변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점과, 다른 하나는 산성 성벽의 축성방법과 같은 특징이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가야계 토기편이 상당량 수습되어, 이들 산성은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했던 가야세력에 의해 처음 축성되었을 가능성도 암시해 주었다.
서부 평야지대에만 밀집된 읍성들
전북의 평야지대에만 읍성(邑城)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읍성은 지방 행정 관서가 있는 마을에 관부와 민가를 둘러쌓은 성으로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수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언제 읍성이 처음 나타났는지는 그 기록이 분명치 않다. 그런데 고려 때 남해안과 서해안의 변방에 주로 축조되다가 조선 초기에 크게 유행하여 그 수가 무려 179개소에 이르렀다. 세종 때부터는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등의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읍성이 집중적으로 설치되거나 개축되었는데, 그것은 고려 말 이후 잦은 왜구의 침입을 막는데 중요한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에 축성된 읍성은 대부분 토성이었으나 조선 초기에는 고창 모양성(牟陽城)처럼 석성으로 바뀌고 그 규모도 상당히 커졌다. 읍성은 평지에만 쌓는 일은 거의 드물고 대개 배후에 산등성이를 포용하여 평지와 산기슭을 함께 감싸면서 돌아가도록 축조되었다. 또한 백제의 수도인 공주와 부여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통과하는 군산시와 익산시, 완주군에 토성과 산성이 유난히 밀집된 점도 평야지대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전북의 동부 산간지대에 한층 밀집된 테뫼식 산성은 주로 군사적인 방어 시설물로써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장수 대성리와 침령산성은 성의 위치와 규모, 풍부한 수량 등을 근거로 군사적인 역할 못지않게 평상시 행정적인 기능도 함께 수행했을 가능성도 높다. 남원 장교리 합미성이 동학혁명 때 동학군이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이미 축성된 산성을 당시에 정비해서 다시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는 이들 산성이 대체로 백제와 신라가 국경을 형성했던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백제에 정치적으로 병합된 가야세력이 처음 쌓았을 개연성도 충분히 내재되어 있다. 반면에 교통의 요충지에 입지를 둔 진안 와정토성, 진안 월계리와 임실 월평리 등 일부 산성들은 내륙 교통로의 안정적인 관리 운용을 위해 축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곽장근 | 1961년 진안군 성수면 용포리에서 태어나 전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역사고고학 분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국립군산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호남 동부지역 석곽묘 연구≫, ≪고고학으로 이해하는 장수의 역사와 문화≫, ≪고고학을 통해 본 가야≫, ≪장수군의 고분문화≫, ≪전북동부지역 가야문화유산≫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