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 |
아직 끝나지 않은 그날의 아픔
관리자(2005-04-08 17:17:14)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약칭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이 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사법살인’을 당한 지 30년이 흘렀다. 현 정부 들어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설치된 후, 인혁당 사건을 1차적으로 조사할 사건 중의 하나로 정하고 조사를 하고 있다. 인혁당 사건은 제 1차 인혁당 사건과 제 2차 인혁당 사건이 있는데, 제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에 대일 굴욕외교 반대 투쟁에 나섰던 사람들이 용공혐의로 제소되었던 사건으로,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담당검사들이 반기를 들어 사임하고, 체포되었던 사람들도 몇몇만 억지로 투옥되었을 뿐 대부분 무혐의로 풀려났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이 선포되면서 서울대를 중심으로 대학생들이 ‘전국민주청년학생연합’(민청학련)을 조직하여 조직적인 반국가 투쟁에 돌입하자, 박정권과 그의 하수인들이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힘없는 사람 몇몇을 민청학련의 배후 간첩으로 조작하여 사형선고를 내리고,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대법원 판결 후 18시간 만에 처형시켜버린 것이 곧 제 2차 인혁당 사건, 혹은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다.
대구 출신으로 대구 사람들이 대구 출신의 권력자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된 사건을 알게 되면서 그들에게 사식을 넣으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했던 작가 김원일은 남로당 경남도당위원장을 지내다가 월북하여 북한의 간부를 지낸 이를 아버지로 두고 있다. 그런 아버지와의 고리 때문인지 김원일은 분단을 주제를 한 소설을 써왔다.
우리나라의 분단의 기본적인 요인이야 외세의 개입이 가장 크기는 하겠으나, 우리 민족 내부의 좌우 이념갈등도 중요한 원인인 것은 분명하다. 북한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건국이후 남한 사회의 병폐가 “친일인사들의 재등용, 농지개혁의 늑장 추진과,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에 따른 경제계획 실패 (38페이지 중에서)”이다 보니 기층민중의 심리와는 많이 차이가 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념적 신념에 따라 남북으로 갈라설 수밖에 없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그 피해를 연좌제라는 악법 하에 고스란히 감내했어야만 했다. 그가 이념색 짙은 인혁당 문제를 소설로 풀어내는데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으니, 그가 껴안고 살았을 큰 부담이 또한 애잔하다.
『푸른 혼』의 시대적 배경은 주인공들이 중학교에 다니던 일제 후반부터 시작하여 해방공간과 6·25, 3·1 부정선거와 이승만 정권의 붕괴, 장면 정부, 5·16 군사 쿠테타, 6·3 사태, 3선 개헌, 유신헌법의 시대를 관통하여 현재에 이른다.
첫 작품 ‘팔공산’은 이후 다섯 편 소설의 시대적 얼개를 거의 제공하고 있다. 일제하의 수탈과 대동아 전쟁 그리고 강제징용, 해방공간, 전쟁,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그리고 온갖 시국사건들이 모두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주인공 송영진은 어릴 때 팔공산으로 숨어든 좌파 이론가 정 선생의 영향을 받지만, 그래도 나름으로 좌우의 중심을 잡으려 노력한다. 학업을 마치고 초등학교 선생이 된 후 교직원노조에 가입하게 되었고 대구에서 좌파활동을 하다가 조작된 인혁당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죄가 경미하다고 풀려나게 된다.
세속을 털고 팔봉산에 은거하며 양봉을 하던 그는 세속을 저버리지 못하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엄혹한 시국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게 된다. 이 와중에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서울대를 중심으로 조직된 민청학련이 유신헌법 반대 투쟁에 나서게 된다. 희생양이 필요했던 중앙정보부는 10년 전에 조작하려다 실패하였던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난장질, 물고문, 전기고문 등 상상할 수도 없는 비인간적인 고문을 가하여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한 간첩으로 조작하여 사형을 유도한다. 마지막 대법원 판결에서 궐석 재판을 열어 항소를 기각함으로서 간단하게 형을 확정하고, 그들에게 꿈꿀 자유조차 주지 않겠다며 다음날 새벽 여덟 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 소설은 죽은 송영진이 1인칭시점으로 쓴 글이다. 죽은 사람이 말을 하는 형국인데, 자연을 벗 삼아 살았던 그는 “육신은 제 명껏 못 산 대신 내 혼은 늘 푸르게 한 마리 꿀벌로 환생하여 오늘도 꽃을 쫓아 팔공산 산자락을 떠돌고 있다”고 소회를 피력한다.
두 번째 소설 ‘두 동무’는 이준병과 김길원의 가없는 우정을 축으로 그려지고 있고, 세 번째 소설 ‘여의남 평전’은 인혁당과 민청학련의 연락책으로 조작되었던 기골장대한 복학생 여의남의 30년 일대기를 담고 있고, 네 번째 소설 ‘청맹과니’는 서상원의 이야기를 담으면서 시대의 악행에 모르쇠로 일관한 청맹과니들을 비판한다. 다섯 번째 소설 ‘투명한 푸른 얼굴’은 도운종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교수형 장면을 세세히 재현하는데, 만신창이가 된 몸에서 빠져나간 혼들이 다시 모여 신인간으로 태어나 광속으로 지구를 벗어나 무릉도원에 간다는 환타지 같은 설정은 그나마 조그만 위안이다. 마지막 소설 ‘임을 위한 진혼곡’은 하시완의 부인이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글은 사건 직후의 관련 가족들의 원통함과 그들 가족이 겪었던 핍박과 고통을 담아낸다. 세월이 달라져 민주열사의 칭호가 붙여지고 이제는 정부가 진상규명에 나선 이들의 30주기를 맞아 남편에게 보내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앞의 다섯 편의 글에서 긴장상태에 있던 독자들의 눈물샘을 기어코 자극하고 만다.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가 있던 국제법학자협회는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사상 치욕의 날’로 선포하였다. 정권욕에 눈이 멀었던 박정희와 그의 하수인들이 만들어낸 군사정권시기의 최악의 범죄로 규정되는 이 사건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화두는 무엇일까. 민청학련과 관련되어 이목과 유민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철(전 국회의원)과 유인태(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는 결국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고 이제 그들의 죄과를 물을 수 있는 처지에 서게 되었다. 80년의 광주민주화항쟁과 80년대 후반의 민주화투쟁 등 앞서간 열사들과 투사들의 희생에 힘입어 후세들은 결국 국정을 농단했던 세력을 몰아내고 민주정부를 굳건히 세웠다.
물론 아직도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사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늦었지만 일제의 잔재도 말끔히 청산해야 하고,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은 기층민중의 생존권보장과 노동자의 권익보호, 비정규직 노동문제 해소, 그리고 우리의 자주통일이 남아있다. 이것은 그들의 염원이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염원으로 남아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사람들은 흔히 세월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이 해결되는 일은 없다. 변혁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삼천여년 전 동서양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우리가 윤리적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오히려 퇴보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억울하게 가신 분들의 넋(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을 위로하고 그 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나눌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30주년을 맞은 2005년 4월에는 그 분들 중 네 분이 묻힌 팔공산 자락에 꽃들이 더욱 환하여 꿀벌이 푸른 하늘을 더욱 힘차게 날기를 기원해본다.
| 김경석 전북대학교 언어교육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