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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4 |
제 98회 백제기행-정읍일대'동진강 물결따라'
관리자(2005-04-08 17:15:42)
가고 또 보고, 조선의 은행나무 작년 5월의 경주 기행에 이어 두 번째 백제기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백제기행과의 처음 만남이 너무 좋아 뒤이은 기행에 참가 신청을 하였지만 가는 날마다 다른 일들이 겹쳐 참가비만 적립하게 되어 안타까웠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문화저널 홈페이지를 방문하고는 제98회 백제기행 소식을 알게 되었다. 서원과 향교기행이라! 기행의 테마가 맘에 쏙 들었다. 더군다나 경주기행에서 처음 뵈었던 조법종 교수님의 자세한 강의까지 들을 수 있어서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휴일의 게으름을 뒤로 한 채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렀지만 애석하게도 지각생이 되어버렸다. 지각한 터에 다른 이들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고 허둥지둥 빈자리를 찾아서 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았다. 내가 소개하여 같이 오기로 했던 가족마저 아무 말 없이 불참하는 바람에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을 갖고 출발하였다. 조법종 교수님께서는 사실 전공했던 분야가 아니어서 약간은 긴장된다고 엄살을 피우면서 이런 겨울날 기행도 나름대로 맛이 있다고 운을 떼셨다. 그리고 어진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유학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는 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 있었던 향교와 서원에 대해서 간략한 설명을 해주셨다. 사실은 먼저 전주향교를 본 뒤에 다른 향교나 서원을 비교해보면 더 좋았지만 여건상 가보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셨다. 1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정읍 고부에 도착하게 되었다. 고부하니까 먼저 녹두장군 전봉준, 고부군수 조병갑이 떠올랐다. 동학혁명의 발상지가 아닌가?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이라 전주보다는 훨씬 춥게 느껴졌다. 바람을 맞으며 도착한 고부향교. 긴장이 흐르는 첫 만남의 순간.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우리의 머릿속 예상을 빗겨나갔다. 양지바른 향교 문 앞에 가지런하게(?) 빨래들이 널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이 시대에 향교의 위치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다들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취해 앞쪽으로 유학을 교육했던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大成殿)이 위치해 있다.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통해 산자락에 위치한 대성전에 올랐다. 어찌 지존하신 성현들이 계신 곳을 허리 펴고 고개 들어 대면할 수 있으랴, 가파르고 좁은 계단도 다 유교적 예를 갖추기 위해서 만들었다니… 대성전에는 중국의 다섯 성인과 여섯 현인, 우리나라의 열여덟 현인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산자락에 위치한 대성전에서 바라보니 좌우에 나이를 알 수 없는 은행나무가 자리 잡고 있어 한층 분위기를 북돋워 주었다. 가을날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을 때 다시 와보고 싶었다. 다른 나무에 비해 병충해에 강하고 굳건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부패하지 않고 올곧은 선비상과 부합하여 향교나 서원에서 자주 볼 수 있다고 한다.   태인 읍내 사거리에는 그 시절 풍류와 휴식의 공간이었던 피향정(披香停)이 위치해 있었다. 얼마나 연꽃향기가 그윽하길래 피향정이라 했을까?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정자 둘레에 상당히 규모가 큰 담수호 가득 연꽃이 만발하였다고 한다. 전주의 풍남문에는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더니만, 고부 피향정의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현판과 서로 한 짝을 이룬 것 같다. 피향정 뜰 앞에는 근방의 비석들이 한쪽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는데 그중에 조병갑이 태산현감이었던 아버지를 위해 세운 비석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검은 빛을 띤 자태를 보아하니 당시 백성들의 원성을 들은 착취의 산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전라감사 이서구 기념비도 있었다. 전에 아들 녀석과 함께 풍남문의 역사에 대해서 배우는 과정에서 조금 귀에 익은 이름이었는데 여기서 보게 되어 뭐랄까, 역시 역사의 흐름은 칼로 자르듯이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의 실타래처럼 다 엮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동해서 태인향교로 갔다. 좁은 계단을 통해서 향교의 문루인 만화루(萬化樓)에 올라 보니 향교 안이 고즈넉해 보였다. 등용문이라 했던가. 향교에서 공부하고 급제하여 입신양명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 할까, 만화루 천장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모양의 수평보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사람의 손길로 다듬지 않고 자연그대로의 곡선을 살린 대들보에서도 그 당시 장인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지금 초등학교가 있는 자리가 전에는 동헌(東軒)이 있던 자리인데 이는 일제가 조선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황국식민교육의 장소로 바꾸려는 의도였다고 교수님은 설명한다. 다시금 일제의 식민정책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태인동헌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동헌이었는데, 태인현의 객사자리에 태인초등학교가 세워지는 바람에 동헌이 학교운동장에 편입되어 있는 형국이었다. 맑고 평안하다는 청령헌(淸寧軒)이라는 현판이 동헌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겨울의 고즈넉한 햇살에 아이들이 동헌마루에 앉아 있는 모습과 어울려 아름답다. 동헌을 지은 장인이 전라감영을 지은 거장이라고 하니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오랜만에 차가운 바람을 맞고 걸어서 그런지 금세 허기가 졌다. 아무리 좋은 금강산 풍경도 제 배가 두둑해야 아름다운 법.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식사. 내 나름대로 백제기행에서 좋은 것을 손꼽으라면 단연코 진수성찬이라는 것이다. 자, 오늘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산나물에 뜨끈한 된장두부찌개. 이글을 쓰면서도 그때 분위기가 떠올라 괜시리 군침이 돈다. 주인양반의 칠보자랑과 함께 나온 조 껍데기 탁주한잔으로 온 세상을 가득 내 몸 안에 채웠다. 이제야 겨울햇빛이 살갑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제 밥도 든든히 먹었으니 새로운 기분으로 나서볼까? 조선의 서민적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원백암 마을에 도착하였다. 마을 어귀에 범상치 않은 모습의 석조물과 당산나무를 대면하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유명한 남근석. 조금은 덜 여문 듯한(?) 남성이지만 꽤나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조물이었다. 풍수의 논리를 따라 마을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남근석과 당산나무가 마을입구에 떡 버티고 있었다. 논 밭 곳곳에 여러 형태의 석조물인 당산이 산재해 있는 걸 보니 당산마을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원백암마을의 당산에 대해서 설명을 듣기 위해 마을회관에 다다랐다. 어르신 한 분이 점심식사를 하시다 말고 마당에 나오셔서 우리 일행을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셨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열심히 마을의 당산과 관련된 내력들을 설명해주시는지 듣는 우리들은 다들 오들오들 떨면서도 차마 그만하시라고 입을 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처음엔 “아는게 없는디” 하셨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정월에 당산제를 지낼 때 마을 사람들이 인구전이라고해서 식구들 수대로 비용을 갹출하는데 집에 있는 소까지 그 몫에 포함을 시킨다는 거였다. 또 장에 가서 당산제 올리는 제수를 살 때에는 물건 값을 깍지 않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여러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는데 다들 없어지고 원백암 마을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음력 1월 1월인 설 명절이 개인적 수직관계의 정립이라면 음력 1월 15일의 정월대보름은 마을의 집단적 수평관계를 연결해주는 의미라는 교수님의 부연설명을 들으면서 당산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공적 교육공간을 만나봤다면 이번엔 지방 사립 교육공간으로서 서원을 찾아갈 차례였다. 국왕으로부터 현판, 노비, 토지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사액서원이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모면했던 무성서원으로 향했다. 신라말의 유학자인 최치원과 상춘곡으로 유명한 정극인 등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무성서원의 문루인 현가루(絃歌樓)에서 내려다보는 단아한 강당(講堂)의 모습은 향교와는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아이들이 나란히 강당 마루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마주 앉아서 경전을 익히는 모습이 눈앞에 오버랩 되었다. 현장에서 유적지 관리원으로 근무하시는 연세 지긋하신 어른신이 무성서원의 내력과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활동을 벌이다 투옥되어 순국하신 과정을 설명하시는 모습이 자못 진지하였다. 여기에 온 어린아이들에게 선조들이 남긴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주는 몫이 어른들에게 있다는 말씀이 기행을 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깊이 녹아 내렸다. 향교와 서원은 조선시대의 정신적인 공간이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생활주거공간이었던  김동수 가옥으로 향하였다. 아흔아홉 칸 집이라는데 당시로써는 굉장한 부잣집이었겠으나 지금은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집만 덩그렇게 남아있었다. 사랑채, 안채, 별당. 말로만 듣던 집 구조를 직접 보니까 정말이지 이해가 쉬웠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안채가 좌우대칭으로 ㄷ자형이었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공간이 철저히 분리되어 각기 나누어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부엌까지도 각자 따로 있었다.   기행에 참여하신 분 중에 도립미술관에서 근무하시는 분이 계셨다. “오늘이 한국현대미술전 마지막 날인데…” 하시면서 너무나 좋은 기회라고 광고를 하신다. 미술전 관람이 덤으로 따라 오는 줄은 몰랐었다. 아내는 백제 기행에서나 볼 수 있는 기회라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관장님께서 직접 작품설명까지 해주신다는 말에 다들 들떠있었다. 이런, 우리가족은 버스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깨보니 텅 빈 버스에 우리 3명만 덩그렇게 남아있었다. 곤히 잠든 아이를 버스에 남겨놓고 아내와 서둘러서 미술관에 들어갔다. 하얀 눈이 미술관을 멋스럽게 만들었다. 허둥지둥 헤매다 일행을 찾았다. 다들 이미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관장님의 작품설명에 빠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예술적 감성이 묻어나는 외모의 관장님께서 작품을 볼 때 작가가 무슨 의도로써 그렸는지 보려하기 보다는 느끼는 대로 보라면서도 자상하게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가져온 작품들이라는데 그 중에는 몇 억을 호가하는 것도 있단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함박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저 멀리 새하얀 설산에 둘러싸인 구이저수지가 어느 누구의 작품보다 멋있다.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그것 참 좋다.” 이 자연의 모습을 어느 누가 흉내 낼 수 있겠는가! 전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아들 녀석이 “아빠, 오늘 너무 재미있었어, 우리 담에 또 오자”하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 장혁진 전주지방법원 예산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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