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5 | [저널초점]
[저널초점 - 청소년 문화환경]
그들 스스로가 일구는 '문화'라는 텃밭
청소년 문화 실체 따라 가기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3-04-07 14:47:56)
4월 13일 오후 7시 전주 '청소년 문화의집' 댄스 연습실.
귀를 찢는 음악소리와 아이들의 땀 냄새가 후끈 더운 열기로 몰려든다.
청소년 댄스 연합팀 EYC 멤버들. 내일 있을 정읍 공연을 위해 쉴새 없이 박차고 뛰어 오르며 연습실이 좁을새라 종횡무진 휘젖고 다닌다.
'흥분한 젊은 아이들(Exited Young Children)'이라며 팀을 소개한 인준이(전주고 3)가 "사진 잘 나오게 해 달라"면서 멤버들과 함께 온 몸을 던져 아슬아슬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서로의 춤 동작에 환호와 박수 갈채를 보내며 아이들은 그렇게 '하나'라는 일체감에 젖어든다.
14명의 댄스 마니아들. 아이들은 좁은 공간이나마 마음놓고 연습실로 이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 동안의 고난과 역경이 담긴 숱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쏟아낸다.
"여기(청소년 문화의집)가 생기기 전에는 한적한 지하보도에서 그것도 새벽에 연습을 해야 했어요. 더러운 바닥에서 추위에 떨어가면서 진짜 고생 많이 했다니까요. 어떨 땐 초등학교 수업 끝나면 학교 현관에서 연습하기도 했구요."
그저 춤이 좋아 춤을 추기 위해 만난 아이들. 어른들의 차가운 시선과 편견, 거기에 부모들의 극심한 반대와 춤을 추기엔 너무나도 척박한 여건. 이 많은 장애들로 아이들은 저마다 복잡하고 '기구한' 사연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산다.
"여기 애들 중에 90% 이상은 부모님 반대를 무릅 쓰고 춤을 추는 거에요. 반대하는 이유야 장래성이나 비전이 없다는 거죠."
EYC는 인문계와 실업계 학생들이 3대 7 정도의 비율이지만, 굳이 대학 진학이 아니더라도 부모들의 반대는 모두에게 공통의 고민거리다. 태연이(완주고 3)의 말대로 비전이나 장래성이 없다는게 가장 큰 이유가 된다. 그러면 어떠냐고 말하는 아이들이 그렇다고 마냥 '대책없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하는 춤은 그저 언더문화라고 취급되고 있어요. 하지만 언젠가 언더문화가 대중문화의 하나로 당당하게 격상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 춤은 하나의 '문화'며 넓게는 직업적 댄서와 연결되는 삶의 '선택'일 수 있다. 이들에겐 절실한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춤이 먹고 사는 '진로'의 문제나 떳떳하게 즐길만한 생활문화로 풀어지기엔 한계가 많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
"여기도 8시면 문을 닫는데, 인문계 아이들은 학교가 늦게 끝나 아예 연습을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땐 또 지하보도를 찾고 다른 연습실을 빌리는 수밖에 없거든요. 직업적 댄서들도 외국의 경우엔 그만큼 대우받고 불러주는 곳도 많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지 못해요. 이제 겨우 케이블 TV에서 강좌나 대회, 공연을 여는 정도죠."
춤을 추고 싶어하는 아이들은 많지만, 이들을 수용할만한 공간은 중화산동에 위치한 청소년 수련원이나 청소년 문화의 집 이외에는 전무한 형편이다. 그나마 중화산동은 교통이 불편해 '청소년 문화의 집'이 여러 모로 '보장된' 공간인 셈이다.
"그래도 여기서 이렇게 연습하게 된 것만도 어디야? 공간 안 늘려줘도 상관없어요. 그냥 인식만이라도 좋게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EYC는 지난 1월 전북대 합동강당에서 첫 콘서트를 갖기도 했다. 포스터 제작에서부터 티켓팅, 장소 섭외 등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이 해낸 일이었다. "7백50석 규모였는데 6백50석이나 찼었어요. 우리가 하는 춤도 하나의 '문화'라는 걸 많은 어른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자신들의 춤을 당당한 문화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우진이는 춤 종류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날을 새도 모자란다"고 제법 전문성을 강조한다.
'춤'이 갖는 '문화'의 당당함을 결코 꺾지 않는 아이들. 공연장이며 연습장이며 수도 없이 부모들에게 끌려가곤 하지만, 아이들은 결코 그들만의 문화, 현란한 몸짓을 거두지 않는다.
EYC가 고교생을 중심으로 한 동호회 성격이라면, '맥스 크루(Max Crew)'는 올해 갓 스무살이 된 대학 새내기들을 중심으로 한 보다 전문적인 댄스 그룹이다.
이들은 전북지역에서 활동하는 청소년 춤 동아리 가운데 성공적인 자체 독립을 이뤄낸 경우다. 12명의 멤버 가운데 단 한명도 부모 반대 없이 자체 연습실을 갖추고 본격적인 프로 댄서들을 꿈꾸는 아이들이다.
"용돈도 모으고 공연 상금도 모았아요. 정말 못 먹고 못 쓰면서 어렵사리 연습실을 마련한 거에요. 오픈할 땐 부모님들과 고사도 지냈어요. 저희는 부모님이 반대하는 경우엔 멤버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좀 더 떳떳하게 저희 활동을 인정받고 싶은 거죠."
맥스 크루 멤버이자 이제 막 대학 새내기가 된 최완호(백제대 1)군의 얘기다. 맥스 크루 역시 여타의 춤 동아리들과 마찬가지로 지하보도를 전전하기도 했지만, 그 보다 더 힘들었던 건 이벤트 기획사에 소속돼 있으면서 어른들의 '상혼'에 상처받았던 기억이다.
"처음엔 공연 무대나마 마련되는 게 어디냐 싶어, 무보수였지만 행복해 하면서 춤을 췄어요. 그런데 그 이벤트 하는 분들이 상업적인 자기 이익만 챙기는게 미워지기 시작하더라구요. 어떨땐 하루에 세탕씩 뛸 때도 있었거든요. 또 어느 기획사에선 아무 조건없이 연습실을 무상으로 준다고 하길래 들어갔는데, 결국엔 또 휘둘리게 됐죠. 그래서 어렵더라도 독립하자 생각을 모은거에요."
맥스 크루는 가장 공신력 있는 댄스 대회라 할 만한 문화부 장관배 댄스대회에서 전국 2위를 차지할 만큼 실력가들이지만, 대회 참가 보다는 공연을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전국 규모의 대회 보다는 전북지역에서 치러지는 대회엔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는 게 이들 얘기다. 거기엔 경연대회가 갖는 난맥상이 작용하고 있었다.
"솔직히 전북지역 대회는 나가기 싫어요. 춤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구청장이나 시장 그런 분들이 심사위원을 맡는 거에요. 공정한 심사는 기대하기 어려운 거죠. 설사 그 대회에서 1등을 한다해도 그리 기분 좋지 않아요. 그건 저희 자존심이기도 하니까요."
'춤' 문화에 대한 제도권의 인식이나 지원이 그만큼 높지 않다는 얘기다. 이는 가까운 일본과도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본은 지방정부나 나라에서 댄서들에게 지원금이나 연습 공간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부족한게 많죠. 정부나 지방에서 문화단체에 지원하는 문예진흥기금도 있다고 들었는데, 청소년들은 처음부터 그 통로가 원천봉쇄 당하는 셈이잖아요."
제도적·정책적 불만이 적지 않지만, 완호와 맥스 크루 팀 멤버들은 이런 지원 여건에 크게 의존하고 싶지 않다는 말도 덧붙인다. 오랫동안 고생해온 만큼,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만큼 앞으로도 그들 힘으로 길을 개척해 나가고 싶다는게 기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저희는 멀리 내다 보려고 해요. 전국 댄서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팀이 되고 싶고, 전주 시내 한 복판에 힙합 스쿨을 열어보는게 가장 큰 꿈이에요. 낮은 단계에서 차차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올라가고 싶어요.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싶지 않아요. 다만, 춤추는 아이들에 대해 색안경만 안꼈으면 좋겠해요."
EYC와 맥스 크루는 정책적 지원 보다 오히려 낮은 인식 때문에 문화적 소외집단으로 남아야 하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고 털어놓는다. 어른들의 따뜻한 시선과 당당한 문화영역으로의 인정, 아이들은 그 작은 바람이 우선이다.
10대들을 대표하는 가장 대중적이고 포괄적인 문화를 꼽는다면, 춤과 더불어 인터넷을 들 수 있다. 아이들에게 인터넷은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의 통로이자, 그들만의 문화를 담아낼 거대한 담론의 장이 되어 가고 있다.
청소년이 만들고 청소년이 운영하는 청소년을 위한 방송(www.cast10.com), 그 쉽지 않은 작업에 뛰어든 지현이(중앙여고 3)와 경진이(중앙여고 2).
방송이라는 특수성과 전문성을 감안한다면, 결코 녹록찮은 작업임에 분명하지만 작업 공간에서부터 장비, 시장 조사, 인력 구성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 손으로 갖춰놓은 '무서운 10대들'이다.
일주일 후 본격적인 방송 개국(4월 22일)을 앞두고 13명의 팀원들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이만한 성과를 얻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아무리 온라인상의 작업이라지만, 장비도 놓고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더라구요. 장비가 많아 관리 문제로 쉽게 공간을 내 준 곳이 없어 결국 청소년 문화의 집을 찾았는데, 운영계획안 보시고 승낙을 하시더라구요. 거기도 한 일주일 정도 쫓아다니며 설득한 결과에요."
처음 인터넷 방송을 제안했던 지현이는 전국 인터넷 경진대회 본선 통과자들로 구성된 ML클럽에서 준비 멤버인 지한이(전주고 3)를 만나 의기투합했다. 청소년이 만드는 청소년 방송은 지현이와 지한이의 열정에 힘입어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된 셈이다.
방송에 필요한 장비와 서버는 와이몰이라는 인터넷 벤처회사를 통해 모두 '공짜'로 지원 받았다. 서울까지 올라가 회사 간부들 앞에서 운영계획을 브리핑하느라 진땀을 흘린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것 저것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데 정말 아찔했어요. 뭐든 공짜 얻기가 어디 쉽겠어요? 하지만 잘만 운영하면 전국은 물론이고, 세계로 뻗어가는 방송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사항이죠."
기성세대들이 운영하는 청소년 방송은 있지만, 거리감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cast10은 청소년이 만들고 운영한다는 점 하나만으로 친밀감과 '눈높이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아이들은 적잖이 고무돼 있다.
"어른들이 하는 방송은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더라구요. 저희는 그렇게 전문적이진 않지만, 우리들의 얘기와 생각을 거리낌없이 표출할 수 있어 진솔한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CJ(사이버 자키)들이 하는 실시간 방송은 정말 생동감 있고, 재미있어요. 방송중에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채팅도 가능해 정말 입체적인 대화가 오고 가죠."
cast10은 모두 일곱 개의 채널이 가동되는데, 음악과 영상, 미용, 친구, 진로 상담 등의 코너로 나뉘어져 운영된다. 지난 12월 시험방송으로 라디오만 진행했지만, 앞으로는 동영상도 제공해 입체적인 방송을 해나갈 계획이다.
뚜렷한 목적과 목적에 따른 방법을 스스로 체득하면서 길을 뚫어가고 있는 아이들. 어른들이 규정해 놓은 수많은 편견과 제도에 주눅들지 않고 아이들은 그들 나름의 자생적인 문화 텃밭을 일궈가고 있다. 그러나 제도권 교육이 '공부' 만을 위주로 시행되고 있는 현실은 아이들에게 어쩔수 없이 버거운 굴레이자, 그들 스스로에게까지 한계를 지워놓는 부분이다.
"인터넷 방송도 부모님들 반대가 대단해요. 학업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인데, 죽었다 깨어나도 대학을 가야 한다는 사회 풍토 때문이죠. 공부가 아닌 무언가에 열정을 쏟고 관심을 갖고 싶어도, 아이들 스스로가 안된다고만 생각하는 거에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에 스스로 얽매어 있는 셈이죠. 그래서인지 청소년 문화라는게 뭔지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이 청소년 문화는 이런거다, 짚어낼 수 있는 창구가 됐으면 좋겠어요."
지현이와 경진이는 인터넷 방송을 준비하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힘으로 모든걸 해결했지만, 그들 스스로의 문화를 찾는데 "주위에서 도와 줬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은다.
청소년의 '문화'는 분명 존재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문화일 수 있다. 향유하고 즐기고 열정을 풀어낼 마땅한 '권리'는 대학과 공부에 발목이 잡혀 있고, 20대를 넘어서야 비로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70년대 젊은이들에게 통기타 문화가 있었다면, 지금의 아이들에겐 춤과 인터넷이 있다. 아이들이 생각하고 움직이고 그들의 욕구를 표출하고자 한다는 사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그 '꿈'을 잊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