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 |
다가산 전주신사1
관리자(2005-04-08 17:12:31)
다가산 이팝나무
식민의 아픔에 눈물 흘리고
이제 조금 있으면 다가산에는, 입하(立夏)에 피는 꽃이라 해서 입하목(立夏木)이라 불렀다는 이팝나무 꽃이 온 산자락을 하얗게 덮어버릴 것이다. 지금은 아카시아에 치여 한 귀퉁이로 쫓겨나 그저 연명만 하는 처지가 서러워 여름을 재촉하는 늦봄의 보슬비에 하염없이 하얀 꽃잎만을 흩날리면서 100년을 넘게 울고 있는 이팝나무의 꽃 눈물은 다가산의 씁쓸하고 암울한 치욕의 역사에서 출발한다.
다가공원엘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들이라면 정상까지 난 도로를 거쳐 다가산 정상 올라 시내를 한번 굽어보곤 한다. 그러면서도 도로와 광장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질 않는다. 지금은 잊어진 과거의 치욕이긴 하지만, 서울 남산공원이나 부산 용두산 공원 그리고 군산의 월명공원 등 도심부에 있는 공원들은 뭔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도심 속 공원에다 산 정상부까지 도로가 있고 광장이 있고. 그 키워드는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강제병합한 이후 일선동조(日鮮同祖), 일시동인(一視同仁)의 명분을 내세우면서 황민화(皇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강화된 ‘신사(神社)’이다. 신사란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우리가 숱하게 다녔던 다가공원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주사람들을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신사가 세워진 곳이 다가산의 정상이고 그곳에 오르는 길을 ‘참궁로(參宮路)’라 해서 잘 닦아 놓은 것이다. 일제시대 다가교를 대궁교(大宮橋)라 부른 것도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였기 때문이다.
전주에 신사가 세워진 것은 언제일까? 『전주부사』에 의하면 일본의 강점 직후 몇몇 일본사람들이 목조의 도리이(鳥居)를 다가산 정상에 세우고 요배소(遙拜所)를 만들었다고 한다. 전주에 일본인이 처음 들어온 것은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직후로 1896년 경이며, 그들이 주로 거주한 곳이 바로 서문밖이었다. 따라서 다가산은 일본인들 거주지에서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요배소 설치장소로는 제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타의 다른 도시들을 보면 신사는 그 도시가 가장 잘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세워졌었다. 그렇다면 전주의 경우 오목대가 최적지였을 것이지만, 오목대는 이성계가 대풍가를 불렀다는 곳이고 선대 전주이씨의 세거지가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신사건립지로 낙점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진 1> 아련히 다가산 정상에 보이는 목조의 도리이는 바로 전주에 들어 온 일본인들이 세운 목조의 도리이 그것이다. 일본인들이 초창기 전주에서 거주했던 고사동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바로 이러했을 것이다. <사진 1>에 있는 다리는 이 때까지도 사마교라 불렸을 것이다. 조선시대 선너머로 이사 간 향교에 글을 배우러 다니던 선비들이 건넜던 다리라해서 붙여진 이름은 왜란이 끝난 뒤 향교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뒤에도 여전히 선비들의 다리였다. 지금의 신흥학교 자리에 희현당이라는 요즘으로 치면 도립 학교가 있었으니 그 다리의 이름값은 여전했던 것이다.
전주신사 건립은 메이지 천황이 죽고 난 이후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된다. 당시 전라북도장관이 이두황을 비롯 지역 유지들이 전주신사 및 공원건설 위원으로 9천여원을 거출하였고, 다가산 부근 1만1800평 등의 땅을 고사동의 이건호 외 3명이 기부하여 공사에 착수 1914년 10월 완공되었다. 이리하여 다가산 정상에는 신사와 사무소가 건립되고 다가산 밑 광장 현재 천양정 앞에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웅장한 석조 도리이(鳥居)가 세워졌다. <사진 2>와 <사진 3>에 보이는 석조의 도리이는 일본의 조선 침략이 완공되었음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다가산 초입을 떡 하니 가로막고 서있었다.
이후 이강원, 김도홍, 이준상, 유익환, 문문교, 백인숙 등이 포함된 총 12명의 전주신사강위원(全州神社講委員)이 위촉되었다. 1915년 8월 조선총독부가 신사사원규칙을 발표하여 현재 건립되어 있거나 건립중인 신사, 요배소 등의 창립수속을 밟도록 지시에 따라 전주신사도 1916년 2월 신사창립을 출원하여 9월에 인가를 받았다. 당시 구성된 창립위원 중에는 전주지역의 유지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는데 김영철, 박영래, 신언태, 박기순 등이 바로 그들이다. 신사창립이후 숭경자총대회(崇敬者總代會)가 조직되고 신사를 관리운영하게 되고 인창환, 백남혁, 김봉철 등이 활동하였다.
한편, 일본은 1935년경 이후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된다. 우선 각급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한편 이를 거부한 신흥학교, 기전학교를 1937년 폐교시켰다. 일본의 신사참배강요에 대해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에 응했으며, 기독교의 경우 역시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참배에 참여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전북지역에서는 남장로파 교회 146개소 신도 1만8천명이 신사참배를 시행하기로 했고, 만경 무주 금산 웅포 삼례 등의 각 교회에서도 전교도의 만장일치로 참배를 결의하기도 했다.
강제적인 신사참배가 계속되자 1939년 전주신사는 신사 확장을 위한 대규모의 공사에 착수하게 된다. 총 25만868원 규모의 전주신사 확장을 위해 추가 용지 2만7천평 중 8천평을 미국예수교 남장로파 조선교회유지재단의 협조를 받았으며 나머지는 지역유지의 기증으로 이루어졌다. 이로써 전주신사는 3만8천6백평에 달하는 거대한 신사로 다시 태어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중지되었다.
신사가 세워진 이래 일본왕을 위한 대규모의 경축행사에 동원되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충실한 신민(臣民)을 만들기 위해 천황을 향해 참배하도록 강요당한 전주사람들의 눈물을 전주천의 여울과 이팝나무는 지금도 그 자리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