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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4 |
'햇장은 쌈빡히도 날내 나는 벱이다'
관리자(2005-04-08 17:09:39)
밀어(密語)는 글자 그대로 깊고 그윽한 말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기도 한다. 좀더 실감나게 말하자면 일생을 성찰과 수행으로 일관하며 얻은, 깊은 깨달음에 도달한 큰스님이 이승을 떠나는 순간에 그 깨달음을 짤막한 한두 마디에 담아 전하는 그 결정적인 말이 곧 밀어다.     큰스님들의 경지에 비교할 수는 없으나 보통 사람들의 경우도 살아가다 보면 그 나름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띠는지는 둘째로 하고 우선 그 깨달음은 적어도 당사자에게는 판단의 준거요 행동의 지침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만약 그것이 그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정도의 일반성을 지닌다면, 돌멩이 하나가 만들어낸 파장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일정한 공동체 속으로 확산되어 간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하다. 오늘 우리가 방언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나눌 소박한 밀어는 바로 방언으로 표현되는 속담들이다. 이것은, 인간세계와 우주의 질서를 꿰뚫는 깊은 깨달음과 결코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 깨달음을 얻게 되는 환경이 곧 그들이 살아온 삶의 구체적인 순간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표현 또한 그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일정한 공동체를 토대로 하는 문화의 반사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오늘의 이야기 ‘햇장은 쌈빡히도 날내가 나는 벱이다’ 역시, 잠들어 있는 수면을 깨우는 첨벙 소리 가운데 하나이다. 우선 이 표현은 사용된 어휘의 소박함에서부터 정답다. ‘햇장’은 그 해 처음 담근 장이다. 우리말에서 그해에 처음 난 것의 의미를 가진 접두사 ‘해-’와 명사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파생어는 아래와 같이 세 가지 표기 방식으로 나뉜다. ① 해콩, 해팥 ② 햇감자, 햇강아지, 햇것, 햇고구마, 햇곡식,      햇김치, 햇나물, 햇누룩, 햇보리, 햇솜 ③ 햅쌀, ①은 명사의 첫소리가 본래 된소리나 거센소리이어서 사이시옷을 쓰지 않은 예이고 ②는 명사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발음되거나 ‘ㄴ’소리가 덧나는 경우이어서 사이시옷을 쓰는 예이며, ③은 쌀의 중세국어 형 ‘    ’이 ‘해-’와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을 반사하는 예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햇장’은 ②의 유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얼마든지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잠재적 단어이다. ‘쌈빡하다’는 ‘삼박하다’ 즉 ‘작고 연한 물건이 가볍게 한번 베어지다’의 센말이다. 이 말은 흔히 전라도 방언으로 여겨지지만 사전에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어서 인식으로는 방언이면서 규정으로는 표준어에 해당하는 헷갈리는 단어 가운데 하나이다. 어떻든 이 말은 사전적 풀이대로 무나 당근 같은 것을 예리한 칼로 싹둑 자를 때 느껴지는 경쾌하고 깔끔한 느낌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날내’는 ‘익지 않은’ 혹은 ‘익히지 않은’의 뜻을 가진 접두사 ‘날’과 ‘냄새’를 뜻하는 명사 ‘내’가 합해서 이루어진 파생어이다. 그래서 날내는 비릿하고 풋내 나는 것을 아우르는 셈이다. ‘날내’ 역시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면 예전에 지푸라기나 겨로 불을 땔 때 나던 냄새 ‘냇내’는 방언인가 표준어인가? 이쯤 되면 방언과 표준어를 가리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든 방언과 표준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으로 보이는 어휘들이 조합하여 만들어진 말, ‘햇장은 쌈빡히도 날내가 나는 벱이여’에 다시 집중해 보자. 이 말이 사용될 정황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말은 변화를 좋아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시대의 얄팍함을 의식 위로 건져낸 것이고 또한 그 삼박한 이면에 숨어 있는 날내의 비릿함을 상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예리하다. 쌈빡한 것과 날내가 좋아서 햇것을 찾는다면 또 할 말이 없지만, 새것에는 분명히 비릿하고 덜 익은 날내가 스며있다. 그것이 음식이라면 모를까 인간 세상으로 올라오면 날내 나는 것들은 날내 나는 것들끼리 어울려야 제 격이고 그 날내의 비릿함을 탐하는 것은 탐욕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그 탐욕스러움을 묵은 장과 햇장 사이의 장맛으로 비유해 낸 이 표현 속에는 장맛처럼 우러난 인간관계의 그윽한 가치가 간파되어 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장맛, 진국과 같은 표현들은 날내와 대조되는 표현들이고 그 또한 음식 문화가 유별나게 발달한 이 고장 사람들의 생활을 배경으로 그 깊은 맛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 ‘짐치도 오래 두면 군둥내 난다’는 말도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듯싶다. ‘군둥내’는 ‘구린내’와 닮아서 맛으로 치면 지나치게 오래 방치한 결과로 생기는 고릿한 맛에 해당한다. 그러니 이 또한 결코 유쾌한 냄새가 아니다. 날내와 군둥내 사이를 유지하는 것, 그 적당한 자신의 냄새를 간직하는 것 역시 인간관계를 비릿하지도 구릿하지도 않도록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신의 미적 자원임을 잊지 마시라. | 언어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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