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5 | [문화칼럼]
실증론에서 찾아야 할 사회적 '공동선'
오용규
전북대 교수·무역학과(2003-04-07 14:46:09)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모든 사회 과학의 기능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회 과학 분야는 아직도 규범적 논의를 중시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비록 과학적 이론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반 사회 현상에 대한 일반인들의 해석 또한 규범적 입장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우리 나라의 경우 기업의 부실 회계 정도가 심한 현상을 놓고 기업인들의 도덕성을 비난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기업인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개인적으로 특별히 도덕성이 떨어지는지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부실 회계가 왜 발생하는지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조사하여 이해하여야 만이 부실 회계를 줄이거나 방지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깝게 본다면 정치자금이나 뇌물이 기업 운영상 필수적인 기업 환경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고 멀리는 남성 우위적이고 중앙 집권적인 우리 사회의 문화적 특성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대처 방법이 달라짐이 당연하다.
실증적 태도에 대한 비판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보수주의라는 주장이다. 실증적 경제이론에서는 오랫동안 존속하는 제도나 정책 혹은 조직은 효율적이라는 '경제적 적자생존'을 당연한 전제로 받아 들인다.
이 전제는 현존하는 현상에 많은 문제가 있고 상대적으로 현존하지 않는 다른 대안의 경우 그러한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해서 다른 대안을 택하면 안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대안보다 장기적으로 존속된 현재의 안이 상대적으로 문제가 적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자칫하면 보수주의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실증론적 입장이 결코 변화를 거부하거나 방해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사회의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모든 제도는 다시 효율적인 방향으로 모습을 바꾼다고 본다.
아울러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가치관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객관적이고 집단주의적인 가치관으로 변화된 현대의 혼합경제 체제에서는 실증적 이론의 역할이 더욱 커진다고 말할 수 있다. 집단간의 가치 분배 과정은 정치적 과정인데 이 과정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조직 비용, 정보 비용, 로비 비용 등이 많이 투입된다. 집단이 부담할 수 있는 이러한 정치비용의 크기에 따라 두 집단간의 분배 비율이 결정된다.
따라서 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실증적 연구가 이루어 진다면 정치 비용을 많이 부담할 수 없는 집단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지게 된다. 실증적 이론이 사회 전체적으로 정치 비용을 줄이기 때문이다. 결국 실증 이론은 사회적인 공평성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효율적이고 공평하게 해결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제 현상에 대해 과학적이고 실증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함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주 당연한 일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현상 해석과 가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정책 결정은 효과적이지 못하다.
과외 수업을 '근절하기' 위하여 수십년간 무수하게 대학 입시 정책을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교육비가 공교육비를 능가하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책 결정은 '바람직하면서 동시에 달성 가능한' 정책 집합안에서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실증적 이론은 달성 가능한 집합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 집합 안에서의 최종 선택은 선택권자, 대부분의 경우 다수의 일반 국민의 선호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절차를 '적정한 절차'라고 한다.
모든 집단과 사회 전체가 이러한 적정한 절차를 거쳐 정책 결정을 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인 것이다. 전문가(이론가) 집단이 최종 결정을 하도록 하는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선(善)이라는 미신은 깨져야 한다.
oyk3027@moak.chonbuk.ac.kr
오용규/1952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현재 전북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NGO 단체인 '시민행동 21'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역서로 『실증적 회계이론(1986)』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