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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4 |
예수병원 역사자료관 김천식 실장
관리자(2005-04-08 17:04:19)
허영을 버리면 진짜가 보인다 많고 많은 병원들이 있지만, ‘예수’라는 이름을 병원이름으로 내건 곳이 전주 예수병원 말고 또 있을까? 참 자신감 넘치고 대담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것이 예수를 자임하는 직설이 아니라 예수의 정신을 담은, 예수와 같음을 의미하는 은유이겠으나, 그렇다 해도 예수병원이라는 이름은 한번 들으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임팩트가 센’ 이름이다. 동학혁명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1898년, 피부가 하얗고 눈이 파란 서양 의사들이 와서  아픈 사람들을 불러모아 마술처럼 신기하게 치료를 해줬다. “예수의 이름으로” 들어온 사람들인지라 예수의 한자이름인 “야소병원”으로 불리던 이 병원은, 언제부턴가 한글이름 “예수병원”이 됐다. 그 역사만 해도 무려 106년. 우리들의 뇌리에 그저 ‘근대사’ 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동학혁명 언저리에서부터 예수병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쯤 되면 예수병원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근현대사요, 전북의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서 내보일 준비를 하고 있는 곳이 있다. 예수병원 기독의학연구원 2층에 자리하고 있는 ‘역사자료전시관’이 바로 그곳. 본관 의학도서실 한켠에 소규모로 전시를 해오던 것이 이쪽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내용도 풍부해지고 전시 규모도 커졌다. 이사를 한 지 이제 한달 남짓. 아직도 몇몇 자료는 그냥 쌓여있는 채고 군데군데 정리가 안 된 부분도 보이지만 100여 년 전 자료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풍경은 꽤나 흥미롭다. 그 한가운데서 분주히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 사람이 김천식 실장이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1976년에 전주로 내려와 줄곧 전주사람으로 살고 있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탓에 병원 홍보실 업무를 보며 지역사회 보건사업에도 앞장섰던 김천식 실장. 기록보존이나 자료관리에 남다른 노하우가 있는 김천식 실장 덕분에 예수병원 역사자료관은 이만큼의 규모를 갖추게 됐다. “역대 외국 원장님들 중에서 지금 두 분이 미국에 생존해 계십니다. 그 분들이 가끔 한 두 개씩 자료를 보내오곤 해서 그냥 개인적으로 모아놨어요. 그런데 병원이 개원 100주년을 맞으면서 체계적으로 역사를 정리해놓을 필요성이 제기됐죠. 그래서 제가 홍보실에 근무하는 틈틈이 미국으로 날아가서 당시 전주에서 일하셨던 선교사님 댁을 찾아가서 사진도 가져오고 기념될 만한 물품들을 가져왔습니다. 어떤 때는 미국 안에서만 비행기를 8번이나 갈아타기도 했어요. 자료를 갖고 계신 분들이 각 주에 흩어져서 살기 때문에 이동거리만 해도 만만치가 않더라고요.” 그렇게 발품 팔아가며 모으기 시작한 자료수집이 1998년 개원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완성단계에 접어들었고 예수병원 100주년 기념 역사자료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서문교회 100년사』의 표지에 실린 교회사진도 김천식 실장이 미국의 선교사 자료관에 가서 가져온 것. 당연히 교회에는 있는 줄 알고 안 가져오려다가 “혹시 몰라서” 가져온 것인데 정작 서문교회에는 그 사진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자료가 많지 않더라고요. 지금도 미국에 계시는 원장님께서 희귀본 몇 가지를 갖고 계신데 아직은 줄 수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런가 했더니 한국전쟁을 기억하시는 그 원장님이 또 전쟁이 날 것을 염려해서 통일이 된 후에 주시겠답니다. 혹시 자료가 소실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렇게 어렵사리 모은 자료들은 김천식 실장이 직접 디자인해서 주문 제작한 유리전시관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자료정리가 끝나는 4월쯤이면 일반인들에게 개방될 예정. 역대 원장들의 사진과 소장품들 중에서 특히 최초 설립자인 마티 잉골드 여사의 육필 일기장과 세월을 머금어 누렇게 변한 레이스 천 등이 눈에 띈다. 또 초창기에 사용했던 무시무시한(?) 위내시경, 청진기, 수술도구 같은 희귀한 자료들도 눈길을 끄는 부분. 연세대 병원이나 대구 동산병원에도 비슷한 성격의 역사자료관이 있지만, 100년 전 의사들이 직접 사용했던 의료기구를 전시하고 있는 곳은 예수병원이 유일하다고 한다. 더러 녹이 슬고 낡고 희미해지기는 했으나 그래서 더욱 귀한 자료들이 아닐 수 없다. 워낙 희귀한 자료관인데다, 예수병원 역사 자체가 우여곡절이 많아 여기저기서 관심을 보내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우연히 미국에서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한국인을 알게 됐는데 설립자인 마티 잉골드 여사의 다이나믹한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잉골드 여사의 극적인 인생역정이 미국인들의 구미에도 잘 맞기 때문에 조만간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을 잘 사귀고 발이 넓은 김천식 실장은 ‘달란트’가 많은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다. 미국의 영화감독을 비롯해서 전 세계 곳곳에 친구를 두고 있는데다, 사진실력 또한 수준급이어서 이미 개인사진전도 가진 바 있다. 지난 2001년에 가진 <김천식 배낭여행 사진전>이 그것.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배낭여행을 즐기는 ‘여행 마니아’이기도 하다. 일년에 두 차례 이상 배낭여행을 다녀온다는 김천식 실장은 전시관을 꾸미는 바쁜 와중에도 책상 한 귀퉁이에 터키에 관한 책과 자료들을 수북히 쌓아놓고 탐독 중이다. 5월 터키여행을 앞두고 틈나는 대로 공부를 하는 중이라고. 여행을 하는 데 무슨 공부? “여행을 하려면 사전에 공부를 많이 하고 가야 합니다. 저는 여행의 목적을 세 가지로 잡는데요. 첫째는 역사적인 측면, 둘째는 미술, 문학 등 문화적인 측면, 셋째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어요.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미리 공부하고 현장에 가서 확인하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서 잊혀지지가 않거든요. 한 나라를 여행하는 데 적어도 다섯 권은 읽고 갑니다.”       86년 일본에서 두 달간 생활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그의 여행길은 유럽여행 다섯 차례, 미국여행 두 차례, 일본여행 한 차례로 이어지면서 어느덧 배낭여행 전문가로 그를 이끌고 있다. 여행 이야기를 일간신문에 연재할 정도로 그의 여행은 짱짱하고 깊이가 있다. 단체 패키지가 아닌 배낭여행을 선호하는 이유는 겉모습이 아닌 속내용을 담아오고 싶은 그의 욕심 때문. 그의 배낭 속은 일반 카메라, 슬라이드 카메라, 캠코더 등의 장비만으로도 꽉 차버린다. “해마다 여행을 다닌다고 하니까 다들 제가 엄청 돈 많은 부자인 줄 알아요. 사실은 전혀 아닌데 말이죠. 내 나이쯤 되면 아파트도 3,40평은 기본이고 자가용도 중형 이상 굴리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저는 아니거든요. 운전도 못하고 자가용도 없고 집도 얼마 전에 겨우 23평으로 이사했어요. ‘작은 집에 살면서 크게 살자’는 것이 제 모토입니다. 집에 퍼들일 돈 있으면 그 돈으로 여행을 가자는 것이 제 신조이고, 또 그것이 더 인생에 보탬이 됩니다.” 연탄보일러를 때는 아파트 5층에서 20년을 살았던 그는 연탄 배달꾼이 5층까지 연탄을 올려주는데 웃돈을 요구하자 손 걷어붙이고 500장을 직접 나를 정도로 ‘독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도 삼천동 집에서 병원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하는 그는 “자가용 있는 사람은 7시 50분에 출근하지만 나는 7시 20분이면 도착한다”며 사람 좋게 웃는다. 그게 그냥 독해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내셔널 트러스트 영구회원이기도 하다. 역사자료관 뒤편에 선교사가 묻혀 있는 작은 선교동산이 있는데, 이를 영구히 보존하고 싶은 생각을 하던 차에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만나게 된 것. 민간인들이 기금을 모아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물을 사들여서 영구히 보존하는 내셔널 트러스트의 운동방식이 마음에 들어서 직접 본부에 전화를 걸어 가입한 열성파다. “제가 여행을 하게 된 동기는 워즈워드의 시 한편 때문입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마다 내 가슴은 뛰노나…’ 그 시에 감동을 받아서 워즈워드 생가도 찾아가 보고 초등학교를 다녔던 동네도 찾아가 보고 했는데, 당시의 집들이며 나무들이며 모든 것들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너무나 다른 문화죠. 세계여행을 하다 보면 정말 배울 점들이 많습니다.” 김천식 실장의 발의로 현재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자연보존 기금을 모으는 중인데, 이름도 없고 뚜렷한 목적도 없고 그저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을 보호하자”는 취지만 갖고 있다. 이 정도의 열성이라면 환경운동단체에 이름을 내걸 법도 한데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시작은 순수하게 하는데 나중에 보면 꼭 정치화되더라고요. 옆에서 그런 것을 많이 지켜봤어요. 환경운동이 정치화되고 권력화되면 초기의 순수한 뜻은 필연적으로 훼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을 지키는 일은 정치적으로 할 일이 아니에요. 그냥 조그맣게, 조용히, 그저 청소만 하자, 풀이라도 뽑자, 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해야 평생 지속할 수가 있는 겁니다.” 차가 없어서 불편한 적 없고 내년이면 정년퇴임이지만 노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그. 그게 다 스트레스 없이 편안하게 살기 때문이라고, 여행이 그렇게 만들어줬다고 여행예찬론을 편다. “사람 사는 모양은 다양합니다. 제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한국사람의 일상에서 거리를 둘 수 있는 것도 해마다 외국을 다니고 외국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허영과 허세를 모릅니다. 돈보다는 역사와 문화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그런 자세를 늘 배우고 옵니다. 이해관계를 따지기 전에 진실한 친구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여행의 장점이죠.” 여행을 하는 것 못지 않게 여행을 계획하고 구상하는 동안에도 즐겁고 행복하다는 김천식 실장. 묵을 숙소와 둘러볼 장소, 꼭 챙겨야 할 자료들을 점검하며 마음은 벌써 여행길에 올라 있다. 여행을 계획하는 시간부터 돌아와서 기록하고 추억하는 시간까지도 그는 여행으로 친다. 인생을 흔히 여행에 비유하거니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볼 때 만족스럽고, 남은 인생을 계획할 때 즐겁고, 남기고 갈 흔적을 마련하는 시간 동안 행복하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 아닐까.   삶의 질을 생각할 뿐 삶의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그는 역사자료관 개관을 앞두고 마지막 마무리 손길을 서두르고 있다.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역사라면 왠지 진실하고 믿음이 갈 것 같다. 허세와 과장, 낯내기에 질린 사람들은 다가공원에 철쭉이 필 무렵 예수병원 역사자료관을 찾아보시길. 작은 언덕길을 쉬엄쉬엄 걸어서 올라가다 보면, 거기, 허영에 물들지 않은 얼굴 하나가 환히 웃으며 기다리고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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