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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4 |
트로이 여인들
관리자(2005-04-08 17:03:21)
탄탄한 연기력으로 만난 시적 무대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 신은 곧 조상들의 부모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과 이상을 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대리만족시켰다. 그러기에 그리스 신처럼 인간적인 신이 없었다. 그리스의 신은 인간의 다양한 감성을 자유분방하게 표출하는 창구이기도 했다. 서양문화의 출발을 그리스에 두는 것이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활발히 꽃피웠던 문화예술, 그 중심에 종합예술인 연극이 있음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주시립극단이 창단 20주년을 맞았다. 창단 공연을 지켜본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유년과 소년기를 지나 당당히 성인식을 치르는 나이가 된 것이다. 60회 정기공연으로 성인식을 치르는 전주시립극단의 공연을 지켜보는 마음은 그래서 남달랐다. 객관적으로 작품 그  자체를 감상하는 일보다 시립극단의 변화된 모습과 함께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이십년 동안 극단을 지켜온 몇 몇 단원들의 연기를 통해 느껴지는, 솔직히 시간이 주는 감동에 더 압도되었다. 서양연극의 기원을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제전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원전 7, 8세기 경부터 본격화된 이 축제를 통해 연극은 공연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춤과 음악,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서사시로부터 출발한 이 양식은 정부와 시민, 그리고 연극인들의 노력으로 희랍극이라는 하나의 전형을 창출해내었다. 흔히 극작에 있어 삼일치법이라든지, 연극의 발원을 보여주는 코러스의 존재라든지, 프롤로그, 파로도스, 에피소디온, 스타시몬, 엑소더스로 이어지는 구성 등은 고대 그리스극을 특징  지우는 전범이 되었고 고전주의극의 근간을 이루면서 현대의 연극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비단 극형식뿐만 아니라 작품에 담고 있는 사상과, 소재,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설혹 그것이 신들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인간의 심리적 근원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평가되면서 현대극과도 일맥상통하며 교우하고 있다. <트로이의 여인들>의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그리스의 대표적인 3대 비극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다른 두 작가, 소포클레스나 아이스킬로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운한 편이었다. 극작가로서도 그렇지만 가정적, 사회적으로도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대에는 두 작가에 비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력을 발휘하는 작품세계로 인해 오히려 현대에 더 높이 평가되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총 90편 가량의 희곡을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전해지는 작품은 19편이다. 그 중 <엘렉트라> <메디아>, 그리고 이번 공연된 <트로이의 여인들>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관중들이 이미 알고 있는 신화나 전설에서 소재를 취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그리스 작품이 극작품 이전에 하나의 신화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의 독창성은 신화나 전설을 탈피해 대담하게 현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사회의 정치, 종교, 철학적 제 문제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여 다루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는데, 바로 그의 이런 면모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더욱 주목받는 극작가가 될 수 있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여성 문제에 있어서도 독창적 시각을 드러낸다. 배신당하고도 분연히 일어서 복수를 꿈꾸는 한 여성의 모습을 그린 <메디아>나 남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에 희생양이 되는 여성들의 내면적 갈등을 추적하고 있는 <트로이의 여인들>과 같은 작품들은 에우리피데스가 사실주의의 선구자적 구실을 했다는 평가와 함께 반전, 여권운동의 효시라는 찬사까지 가능케 했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전쟁을 테마로 하고 있지만 전쟁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작품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인간이다. 전쟁의 뒤안길에서 갈가리 부셔지고 찢기는 인간, 그리고 모성의 절규를 들려준다.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헤카베, 아이를 살인자에게 뺏기고 떠나야하는 안드로마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시립극단은 이번에 그 어느 작품보다 진지하고 신중하게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현대인들에게 낯설고 다소 지루할 수밖에 없는 전통 희랍극을 연출한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시립극단은 이 모험을 기꺼이 감내했고, 무대 위에 역량을 집중시켰다. 그들의 진지한 몰입은 소리문화전당 연지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숨소리조차 빼앗아 갔다. 시작 전에 이 극을 관객들이 얼마나 참아내며 지켜볼 것인가, 하며 가졌던 우려는 공연이 진행되면서 곧바로 무색한 상상이 되어버렸다. 트로이 전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목마와 중후한 성곽, 전체에 잘 꾸며진 돌바닥이 인상적이었던 무대와, 적절한 간격으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 또한 그리스극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코러스의 안배 등에도 세심히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였다. 특히 배경음악은 한국음악임에도 서양 고전의 비극적 상황에 적절히 반응했다. 해금을 주선율로 삼은 이 음악들은 한국음악이 언제 어디에서나 강한 적응력을 가지고 조화될 수 있다는 변용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두 시간 가까운 공연시간을 지루함으로부터 건져낸 것은 배우들의 연기였다. 자칫 무의미하고 공허하게 들릴 수 있었던 고대극의 시적 언어들을 막힘없이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배우들의 연기 역량은 이 십년을 달려온 시립극단의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굳히게 하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무형의 자산이 된 배우들의 연기력은 시적 언어를 시적 무대로 환치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아쉬움도 없지는 않았다. 헤카베가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해하지만, 공연 내내 거의 무대 앞에 고정되어 있는 동선은 관객 입장에서는 다소 답답하고 부담스러웠다. 또 코러스의 활용에도 아쉬움은 남았는데, 기왕 배치된 코러스라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았을 듯 싶었다. 물론 코러스가 작품에 깊이 개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단순히 엑스트라의 수준을 넘어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봤을 때, 주제를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안무에서 보다 입체적이고 과감한 표현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공연 시간 내내 이 십년 전 첫 공연의 시립극단이 떠올랐다. 그 어느 때보다 정제되고 수준 있는 무대를 마련한 이번 공연은 다시 한번 시립극단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게 했다. 성년이 된 시립극단, 이제 민간극단과 분명한 차별성을 지니고 전북연극을 지키는 커다란 성채로 거듭나야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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