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 |
'돌아보다전'_세 개의 3인전을 통한 전북 미술의 회고와 전망
관리자(2005-04-08 17:01:33)
미래를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일
요즈음의 한일 관계를 보면서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과거 일본으로부터 받은 아픔은 세월이 지나도 치유되기는커녕, 한 갑자가 지난 오늘에도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는 그들의 한심한 작태로 인해 더욱 생생하다.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한 손으로 이웃에게 선린을 외치며 다른 한 손으론 또다시 날카로운 칼끝으로 아물지 못한 상처를 후비는 비열함 때문이다.
그들은 “대다수 일본인은 양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선동하는 사람은 소수의 일본인이다”고 한다. 또는 “대다수 일본인은 독도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며 우리의 불같이 일어나는 극일의 물결을 의아해 한다. 수긍이 가는 구석도 있지만 도대체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남의 것을 훔치려는 도둑이 들끓는데 어떻게 내 물건은 안전하다며 도둑을 나 몰라라 하는가? ‘아닌 것을 맞다’고 우겨 옆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불한당을 어떻게 내 자존심은 건드리지 않았다며 그냥 두는가? 양식이 있다면 도둑을 잡아라. 불한당을 두들겨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입을 닫아라.
최근까지 우리는 대가족을 이루며 살아왔다. 그런 공동체의 생활에서 익힌 덕목은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한다. 그렇게 키워온 우리의 선의를 교묘하게 역이용하는 그들에게 언제까지 미온적으로 대응할 것인가. 불을 보라. 불은 모든 것을 태운 후에야 꺼진다. 결국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들 내부의 썩은 환부를 과감히 도려내고 다시금 활을 들고 말을 달려야 한다.
한국 소리문화의 전당에서 3월 17일부터 시작한 ‘돌아보다’전은 ‘세 개의 삼인전을 통한 전북미술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부제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전북 미술의 사(史)적 정리를 위한 성격의 전람회이다. 미래를 위해 과거를 돌아본다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다양성의 시대, 글로벌 시대라는 이유로 정체성의 탐구를 부정하는 일부 젊은 이론가들이 있다. 정보화의 시대에 그런 성향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예술이 단순한 조형 기법적인 형식을 넘어 그 시대의 심층을 지배하고 있는 이념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닿아있는 까닭에 정체성의 탐구는 큰 의미를 지닌다.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전시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전북미술의 정리를 목적으로 한 전람회이나 한편으로는 ‘전람회를 기획하는 일’의 중요성을 드러낸 전람회이다. 이참에 이번 시평의 초점을 작가나 그룹의 분석에 두지 않고 ‘전람회를 기획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알다시피 기획전은 기획자의 상상력이나 의식이 개입된 기획자의 창작품이다. 그로 인해 작가나 작품의 선정은 기획자의 고유의 권한이며 기획의 의도에 따라 옛과 현대를 아우르거나 동과 서를 넘나든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쉬운 예를 들어본다. 인상파 미술을 기획해 보자. 인상파 미술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완성된 미술의 형식이므로 관람객들은 19세기 후반의 프랑스나 유럽의 작가들과 그림에 표현된 19세기 후반의 유럽의 문화를 대할 수 있다. 20세기 전쟁화를 기획해 보자. 20세기에 일어난 전쟁은 1, 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란 한국전 월남전 걸프전 등이 있으므로 관람객들은 20세기 동양과 서양의 작가들과 그들이 표현한 전쟁의 비참함과 그들이 겪은 파괴의 참상을 접할 수 있고 20세기에 완성된 다양한 미술의 형식을 볼 수 있다. 시간성과 공간성을 더욱 넓힐 수 있는 전람회를 기획하자면 종교화를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러면 관객들은 동서고금의 많은 작가와 그들이 표현한 종교의 교리와 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옛과 현대, 동과 서의 다양한 예술의 형식까지도 알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듯 ‘전람회를 기획하는 일’은 기획자의 시각에 따라 관람객에게 전달하는 내용과 예술의 형식을 달리하기에 또 다른 창작품이라 일컫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알게 모르게 예술가들에게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영향을 끼쳐 예술의 질적 가치를 드높이는 작업이기도하다. 필자가 ‘돌아보다’전의 시평에 앞서 ‘전람회를 기획하는 일’에 관하여 길게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최근에 이 ‘전람회를 기획하는 일’이 전북 미술계에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소리문화의 전당에서 있었던 ‘차이’전, 도립미술관 개관전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4 개의 대형 프로젝트들, 지난달 예술회관에서의 ‘숨’전 그리고 이번의 ‘돌아보기’전이 대규모 기획전이다. 사설화랑인 서신갤러리의 ‘자화상’전도 작으나마 뚜렷한 테마로 작가들의 선의의 경쟁심을 유발시키며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이는 기획전이다. 지금은 폐관한 얼화랑의 ‘띠’전이 ‘자화상’과 같은 성격으로 13회를 이어온 것이 기억에 남는다.
도립미술관과 한국 소리문화의 전당이 기획하는 대규모 전람회는 앞으로 전북미술을 숨 가쁘게 변화시키는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다. 외형의 크기가 아닌 질적 가치의 상승적 변화를 꿈꾸며…
‘돌아보다’전은 책임 기획자가 그룹을 선정하고 3명의 이론가들에게 작가의 작품과 미술사적 정리를 의뢰한 형식의 기획전이다. 다시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지금까지 일반적인 기획전에 전시된 작품과 참여 작가의 구분, 다시 말해서 기획전의 유형을 알아보자. 보편적으로 첫째 ‘자화상’전과 같이 작품의 주제를 설정하고 작가들의 자유 참가를 허용하는 기획전, 둘째 ‘숨’전과 같이 전람회의 주제를 설정하고 작가를 선정한 후 작가들이 토론을 거쳐 개별 작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획전, 셋째 도립미술관에서 4월 17일까지 계속되는 ‘중국미술의 오늘’전과 같이 기획전의 방향에 맞는 작품을 선정하는 기획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유형은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기획자가 작품을 선정하는 기획전이 전람회의 분명한 성격을 부여하며 질적 가치의 시비에도 휘둘릴 일이 없다는 의견이 많다.
‘돌아보다’전은 위에서 구분한 유형 중 세 번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과정을 거치며 두 번째 유형의 전람회와 구별할 수 없는 결과물을 얻었다는 것이 책임 기획자의 아쉬운 토로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도 그 말에 동의한다.
기획자는 “돌아본다는 일, 현재의 이전을 되짚어 본다는 것은 먼지 켜켜이 쌓인 그 때 그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좌표를 확인하는 일임과 동시에 다음 한 걸음을 위한 예비동작의 작업이다. 지역에서 미술하기라는 포괄적 문제의식 아래 전북 미술 문화의 성장 역사를 살펴보고 줄기를 더듬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기술한다. 기획자의 의도가 3개의 삼인전의 아홉 분 작가 개개인의 작품의 변화의 궤적을 통해 그룹 속의 공통분모를 추출해내고 개별 그룹간의 차별화 된 내용을 드러내어 이 지역의 시대정신을 유추하려했던 것이 분명하다면 그의 아쉬움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홉 분의 작가 중 대다수는 그 의도에 맞게 과거의 작품으로부터 현재의 작품까지 출품하였지만 신작만을 출품한 작가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작가의 열정을 탓할 것인가. 아프지만 기획의 진행과정에서 돌출한 작은 실수를 아쉬워할 밖에….
아무튼 지난해의 ‘차이’전에 이어 ‘돌아보기’전을 기획한 소리문화의 전당 관계자가 보여준 전북미술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에 감사한다.